45년 동안 북한에 갇혔다 탈북한 한국인 할아버지에게 한국 대사관은 과연 어떤 대우를 했을까.
최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45년 전 죽은 아버지가 생존 신고를 해왔다는 사연이 전해졌다.
지난 1998년 어느 날, 장영욱 씨에게 굉장히 다급한 목소리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네가 영욱이니? 내가 네 애비다. 나 좀 집으로 데려가 줘”
저승에서… 아니 중국에서 온 전화였다.
영욱 씨의 아버지 이름은 장무환. 문제는, 장무환 씨는 45년 전인 1953년 사망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장무환 씨의 고향인 경북 울진에서는 45년 동안 매년 장무환 씨의 제사를 치르고 있었다.
죽었다는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에 가족들은 슬픔과 충격에 빠졌다.
그 길로 중국으로 향한 영욱 씨와 어머니는 장무환 씨와 45년 만에 상봉했다.
“영욱이야? 네가 이렇게 컸구나…”
대체 45년 동안 가족들은 왜 장무환 씨가 죽었다고 생각한 걸까. 대체 45년 동안 장무환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고향 울진에서 부인과 결혼해 아들 한 명을 낳고 행복하게 살던 장무환 씨.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장무환 씨는 국군으로 징집됐고 1953년 7월 20일 최전선에서 싸우던 장무환 씨는 부상을 입고 북한 포로로 끌려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뒤에 정전 협정이 조인됐다.
그렇다면 포로로 잡힌 장무환 씨는?
장무환 씨는 아오지 탄광 등 탄광으로 끌려가 석탄을 캐는 노역을 해야 했다.
탄광에서의 생활은 참혹했다.
사계절 내내 옷 한 벌로 버텨야 했다.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해 너무 배가 고파서 쥐를 잡아먹는 포로도 있었고 산에서 아무거나 뜯어먹다가 급사한 포로도 있었다.
갱도가 무너져 죽는 일도 비일비재했지만, 북한에서는 포로니까 구해주지도 않았다.
장무환 씨는 악착같이 탄광 생활을 버텼다. 전쟁이 끝났으니 포로 교환을 할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국군 포로들 중에서 남조선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모두 자진 귀순했다”고 조작했다.
이후 장무환 씨는 수십 년 동안 탄광에서 강제 부역을 했다.
그렇게 지하 막장에서 조국을 기다렸던 세월이 45년이었다.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장무환 씨는 모두에게 잊혔다.
45년이 흘러 1998년, 장무환 씨는 백발노인이 된 몸으로 두만강을 건너 스스로 탈북했다.
중국으로 은신한 장무환 씨는 처음으로 주 중국 대한민국 대사관에 전화해 구출 요청을 했다.
아래, 1998년 당시 실제 통화 내역이다.
“여보세요. 나 국군포로 장무환인데…”
– 네. 근데요?
“거기서 좀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중국에 와 있는데 좀 도와줄 수 없는가 해서 내가…” (긴장감에 떨리는 손)
– 하~(한숨) 없죠.
“한국 대사관 아닙니까?”
– 맞는데요.
“북한 사람인데 내가…”
– 아! 없어요. (끊음)
“국군포로인데…” (정적)
너무나 간절한 호소에 대화 도중 전화를 끊어버린 믿기 힘든 대사관의 반응.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장무환 씨의 가족들 또한 대한민국 국방부와 통일부 등에 “조국으로 돌아오도록 도와달라”며 도움을 요청했으나 “지원이 불가능하다”며 거절했다.
결국 가족들이 나서서 탈출 계획을 세웠다. 기차를 타고 중국 항구에 간 뒤, 배를 타고 한국에 입국하는 방식이었다.
“1만 달러를 내놓지 않으면 밀고해 북한으로 돌려보내겠다”며 협박하는 조선족에게 온갖 방법을 동원해 돈을 지불하는 등, 힘겨운 이동 끝에 45년 만에 대한민국으로 귀환했다.
장무환 씨는 울진의 본가로 돌아가 부인, 아들, 형제자매 등 가족과 재회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한평생 재혼하지 않고 남편을 기다렸던 부인과 장무환 씨는 10년 넘게 행복하게 살다가 2015년에 세상을 떠났다.
45년 동안 장무환 씨는 매일 탄광으로 들어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는 최소 3만명에서 많게는 6만명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