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아버지는 양반 가문의 청지기, 청을 들어주는 사람, 요새 말로 하면 집사였다.
귀한 신분이 아니었던 소녀는 아주 어릴 적에 궁녀가 됐다. 그렇게 들어간 궁에서 자기보다 한 살 많은 소년을 만났다.
소녀와 소년은 함께 수학을 공부하며 시간을 보냈다. 소년이 수학을 가르치고 영특한 소녀는 학생이 돼 수학을 배웠다.
소년과 소꿉친구로 우정을 쌓아가며 어느덧 14살이 되던 해였다. 소년은 15살.
그 해, 소년이 소녀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소녀는 울면서 목숨을 걸고 거절했다.
“세손빈께서 계시고, 세손빈께서 아직 아이를 낳지 못하셨는데 제가 승은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소녀가 목숨까지 걸고 소년의 고백을 거절한 이유는 소년이 제왕의 손자, 세손이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이산, 소녀의 이름은 성덕임.
훗날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되는 소년 산은 세손 시절 궁녀이자 자신의 소꿉친구이기도 했던 덕임에게 후궁이 되어달라 고백했다가 거절당한다.
귀한 왕세손이 한낱 궁녀에게 거절당했으나 산은 덕임의 뜻을 존중하고 물러섰다.
그 뒤로도 산은 한 차례 더 덕임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
그러는 사이 긴 세월이 흘렀다.
덕임은 쭉 궁녀 생활을 했다. 산은 보위에 올랐다.
왕이 된 산이 30살이 되던 해였다.
산은 다시 덕임에게 마음을 전하고, 덕임은 비로소 산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15살 때 시작된 왕의 짝사랑은 15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정순왕후의 교지나 정조 때 신하였던 정약용의 기록에서 살펴보면, 산은 여인을 가까이 두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런 산이 일개 궁녀에게 두 차례나 거절당하는 걸 감수하면서도 15년이란 긴 세월을 기다렸던 것.
중전과는 사랑 없는 정략결혼이었다. 명문가에서 들인 후궁 3명도 마찬가지였다.
덕임은 산이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택한 궁녀 출신 후궁이었다.
후궁들 중에 직접 빈호(이름)를 지어준 사람도 덕임이 유일했다.
후궁의 이름은 보통 신하가 지어주는데, 덕임의 빈호인 의빈(宜嬪)은 ‘아름답고 착하다’는 뜻으로 산이 직접 정했다.
이런 일화가 있다.
덕임의 처소가 헐어 산이 고쳐주려고 하자, 덕임은 “아껴야 복을 받습니다”라며 거절했다.
우연인지 모르겠으나, 산 또한 같은 말을 한다.
산은 서재를 새로 짓자는 신하들의 청을 거절하며 “이는 복을 아끼기 위함이다”라고 밝혔다.
누가 누구에게 가르쳐준 것일까. 서로 영향을 받은 건지, 둘 다 같은 말을 했다.
위 내용은 전부 본인의 연애사를 직접 쓴 산의 기록과 조선왕조실록에서 나온 내용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혼인 뒤 고작 5년을 함께했다. 덕임이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덕임이 죽던 날, 산은 덕임의 처소를 찾았다.
덕임은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이리 가게 돼 죄송합니다”
“가지 마라. 가지 마라. 이리 가면 안 된다”
덕임이 죽고 난 뒤, 실록에는 산이 며칠간 정사를 돌본 기록이 없다.
산은 덕임이 마지막 숨을 거둔 곳인 중희당을 본인이 죽을 때까지 직접 집무실로 사용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중희당에서 보냈다.
덕임의 묘소도 자주 찾았으며, 덕임의 사당에서 밤을 새웠다는 기록도 있다.
한 나라의 왕이 평생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여인.
산은 덕임이 죽고 난 뒤 직접 수차례 편지를 썼다.
어찌하여 죽어서 삶을 마치느냐.
나는 이제 와서 네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 확정 짓지 못하고 있다.
네가 다시 살아나서 이승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이 한 가지 그리움이 닿아서 네가 굳세게 이룬다면 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서 궁으로 올 것이다.
마음 한가운데가 참 슬프고 애가 타며, 칼로 베는 것처럼 아프다.
사랑한다.
너는 멀리 떠났다.
나는 저승도 갈 수 없다.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음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사랑하는 너는 어질고, 아는 바가 많고, 총명하고, 슬기롭고, 밝고, 이치를 훤히 알고, 옳고, 예절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런데 너의 목숨은 어찌 이리 가느다랗단 말이냐.
편히 쉬어라.
지금 내가 너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구나.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