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아버지는 을미사변에 가담한 친일파 조선인에, 어머니는 일본인이었던 사람이 있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주욱 그곳에서 자라난 그는 됴쿄제국대학에 입학한 대학 신입생이던 시절, 같은 대학을 다니던 조선인 유학생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너의 아버지가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바로 봉사해야 한다”
그때까지 조선말도 전혀 할 줄 모르다가 그제야 본인에게 한국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자각한 청년.
청년 우장춘은 이후 열심히 공부해 농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반도가 해방을 맞이하자 일본에서는 박사인 인재를 놓치기 싫어 우장춘을 감옥에 가두려는 수까지 두며 한국행을 방해했다.
사실 우장춘은 순수 한국인도 아닌 한일 혼혈이고, 일본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국적도 일본이었다. 가족도 전부 일본에 있었다.
독립 직후 전쟁의 혼란 속에 던져진 한반도보다는 일본에서 넉넉한 지원을 받으며 편안히 지내기를 택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한국으로 오면 매국노의 아들이라고 손가락질받을 게 뻔했다.
그러나 1950년, 우장춘은 자기 발로 조선인 강제수용소에 걸어 들어가 송환선에 탑승해 홀로 한반도로 왔다.
우장춘은 귀국하자마자 열악한 환경에 경악할 틈도 없이 곧바로 우량종자 개발에 매달렸다.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거치며 궁핍해진 한반도의 식량난 해결을 위해서였다.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이 반찬으로 가장 많이 먹는 김치를 담그는 채소인 배추였다.
원래 우리 땅에 나던 토종 배추는 품질이 나쁜 데다 생산성도 좋지 않고 길쭉하고 말라 배부르게 먹을 수 없는 채소였다.
우장춘은 토종 배추를 열심히 개량해 한국 토양에 맞춰 통통하게 자라는 종자를 개발했고, 1955년 개발한 배추 종자를 대량 생산해 농가에 보급했다.
현재 우리가 ‘배추’ 하면 떠오르는 튼실한 모습이 바로 우장춘의 결실이다. 덕분에 한국산 배추만 김치 캐비지(Kimchi Cabbage)로 명명되기까지 했다.
우장춘은 이와 함께 무, 감자 품종을 개량했다. 제주 감귤 재배에도 큰 업적을 남겨 실제 오늘날 제주 감귤 사업이 바로 우장춘의 공로다.
우장춘의 헌신으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기아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우장춘은 한국을 “아버지의 나라”라고 불렀다. 한 번도 “조국”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이는 우장춘이 생전 친일파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959년, 병상에 누운 우장춘은 세상을 떠나기 거의 직전 대한민국 최고의 훈장인 문화포장을 수여받았다.
우장춘은 떨리는 손으로 살며시 문화포장을 쥐고서 “조국이 나를 인정해줘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처음으로 한국을 “조국”이라고 부른 뒤, 우장춘은 눈을 감았다.
우장춘이 죽기 직전까지 연구했던 일은 생산성을 높인 쌀 종자 개발이었다.
얼마든지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우장춘은 일본과는 비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묵묵히 한국 농장을 지켰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보다는 오히려 일본에서 우장춘을 중요한 과학자로 가르치고, 우장춘을 더 열심히 연구하고 책을 내는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