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성군이라 불리는 제22대 왕, 정조.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당시 당파 노론 벽파와 가장 대척을 이뤘다. 노론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은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었기 때문.
이런 노론 벽파의 수장은 문신 심환지였다. 심환지는 일평생 정조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특히 정조가 사망한 당시 어의 중 한 사람이 심환지의 친인척이라 정조 독살설의 배후자로 지목돼 왔다.
심환지를 의심하는 정조 독살설은 정조와 심환지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도, 현대까지도 유력한 설 중 하나였다.
그런데 2009년, 정조가 심환지한테 보냈던 비밀편지 299통이 공개됐다. 공식적인 문서가 아니라, 정조와 심환지 이외의 누구도 그 존재를 모른 비밀 편지였다.
편지를 통해 여러 가지 진실들이 뒤늦게 밝혀졌다.
1. 화완옹주 사면 사건
정조의 고모인 화완옹주가 죄를 지어 유배를 갔다. 정조는 고모의 죄를 사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신하들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중에서도 심환지가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다. 대전 밖에 나가서 관을 내려놓을 정도였다.
관을 내려놓는 행위는 ‘벼슬을 내놓더라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
정조는 “우의정의 행동은 너무나도 지나친 것이다”라며 그 자리에서 심환지의 벼슬을 파직했다.
심환지처럼 잘릴까 봐 무서웠던 다른 신하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실록에도 기록된 이 사건. 그런데 하루 전, 정조와 심환지는 편지로 작당 모의했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강력히 아뢰고 즉시 뜰로 내려가 관을 벗어라. 그러면 일의 형세를 보아 파직할 것이다”라고 지시했다.
알고 보니 전날 심환지에게 자신이 내릴 처분까지 미리 알려주며 지령을 내린 것.
모든 사람이 가장 극렬한 반대파라고 생각하는 심환지를 통해 다른 반발 여론을 잠재우려는 정조의 의도였다.
심환지는 얼마 뒤 다른 직위로 다시 등용됐다.
2. 사도세자 명예 회복 사건
사도세자가 죽자 신음을 전폐하다 따라 죽은 신하 임위의 충절을 기리고 싶었던 정조.
그런데 웬걸, 사도세자의 죽음을 정당화하는 노론 벽파의 수장인 심환지가 “그 훌륭한 충성과 절개가 어두운 하늘의 별과 같다”며 명예 회복을 촉구했다.
덕분에 임위의 명예는 다소 쉽게 회복됐다.
이 또한 심환지를 이용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이끈 정조의 수였다.
3. 심환지 상소 사건
심환지가 상소를 올리며 사직을 청했다. 승정원일기에 상소 내용이 그대로 기록됐다.
알고 보니, 심환지가 올린 상소가 정조가 미리 적어준 내용이었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초안을 받아 고쳐주기까지 했다.
이렇듯 정조는 당파 지도자인 심환지와 겉으로는 대립하는 척했지만 뒤에서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본을 짬으로써 정국을 주도하고 통치에 이용했다.
또 대단한 밀당(밀고 당기기)의 제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경은 생각 없는 늙은이라 하겠다”, “경은 갈수록 입을 조심하지 않는다”고 질책하면서도,
“부인은 쾌차하였는가? 삼뿌리를 보내니 약으로 쓰도록 하라”, “경의 아들이 경이 더 늙기 전에 과거에 합격하는 경사를 보도록 하고 싶다” 등 다정한 안부 메시지를 건넸다.
심환지가 벼슬을 버리고 금강산으로 떠나자 약재와 음식을 바리바리 보내며 시까지 지어주었다.
두 사람 사이 편지에는 기밀이 많이 담겨있었고, 정조는 물에 씻거나 찢어 버리라며 보안을 강조했다.
그러나 심환지도 만만치 않았다. 정조에게 받은 편지마다 받은 날짜와 시간까지 일일이 기록해서 그대로 다 보관해 놓았다.
정조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자 세간에서는 심환지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정작 심환지는 울음을 그치지 못할 정도로 슬픔에 잠겼다.
하지만 세상은 이를 알지 못했고, 심환지는 그 뒤로 약 200년 동안 정조 독살설의 배후로 지목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