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벨기에 귀족소년은 80년 뒤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벨기에 브뤼셀의 한 귀족 집안에서 1931년 막내로 태어난 디디에 세스테번스.

신의 음성을 가까이에서 듣고 전하고 싶었던 디디에는 27세가 되던 해 가톨릭 사제가 됐다.

그는 마침 동아시아의 한 국가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아프리카의 빈국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 나라의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선량한 인간성의 발로이자 성직자로서 신 앞에서 맺은 신성한 서약이기도 했다.

지정환 신부의 젊은 시절 모습들 /이하 유튜브=지정환 신부 회고록

1년간 런던 대학에서 그 나라 언어를 배운 그는 한달 가량의 항해 끝에 1959년 12월 8일 동아시아의 한 항구에 도착했다. 항구의 이름은 부산. 디디에 신부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천주교 전주교구에 배속된 그는 ‘지정환’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2년 뒤 부안군 주임신부로 발령을 받아 그곳에서 가난에 찌들어 사는 농민들을 목격했다.

그는 농민들을 규합해 30만 평에 달하는 땅을 간척하고, 간척에 참여한 농민들에게 그 땅을 나눠줬다. 농민들의 삶이 조금은 나아지리라는 작은 희망을 품고서.

하지만 세상은 험난했다. 농민들은 노름에 빠져 땅을 잃기도 했고, 또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렸다가 힘들게 얻은 땅을 빼앗기고 말았다.

지정환 신부가 처음 지은 치즈 공장

낙심한 그는 더는 한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지만, 64년 산골 마을이었던 임실군으로 옮긴 후 농사조차 짓기 어려운 척박한 환경에 사는 주민들의 처지에 마음이 흔들렸다.

마침 다른 신부에게 선물로 받은 산양을 키우던 지정환 신부는 ‘젖을 짜서 팔면 농가 소득에 도움이 되겠다’고 여겼지만, 산양유를 사겠다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었고 남은 산양유는 그대로 버려야 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으려던 그에게 유럽 사람들이 즐겨먹는 치즈가 생각났다. 벨기에 귀족 출신이 머나먼 이국의 척박한 땅까지 오게 된 수수께끼의 퍼즐이 맞춰졌다.

유럽에는 집에서 치즈를 만들어 파는 곳이 많았다. 한국에서도 가능한 일이었다. 다행히 농민들은 “두부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정환 신부의 설득에 수긍했다.

치즈를 생산하기 위해 우유 품질을 검사하는 지정환 신부(오른쪽)

하지만 귀족가문 막내였던 그 역시 직접 치즈를 만들어 본 경험은 없었다.

마을 청년들을 모아놓고 온갖 시행착오 끝에 결국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와 이탈리아 치즈공장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기를 3개월, 어디에서도 비법을 선뜻 가르쳐주지 않다가 이탈리아의 한 치즈 장인이 지정환 신부에게 비법 노트를 내밀었다.

먼 나라에서 고생하는 신부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선의의 선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정환 신부는 그 사이 흩어졌던 청년들을 다시 모아 본격적인 치즈 제조를 시작했다. 그게 1969년의 일이었다.

임실군 명예군민이 된 지정환 신부(왼쪽) /연합뉴스

이후 한국 현지에서 직접 만든 신선한 치즈가 입소문을 타면서 임실치즈는 지역의 경제를 뒷받침하는 상품이 됐고 오늘날까지 이르게 됐다.

임실치즈의 개척자, 지정환 신부는 13일 오전 10시 숙환으로 선종했다. 향년 88세.

고인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16년 우리나라 국적을 받기도 했다.

빈소는 전주시 덕진구 천주교 전주중앙성당에 마련됐으며, 장례미사는 16일 오전 10시 진행된다.

고인의 시신은 전주시 치명자산의 성직자 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어린 시절 작은 형(왼쪽)과 함께 한 지정환 신부(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