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보다 더 뛰어났다” 진짜 광기가 느껴지는 우리나라 천재 과학자 이휘소 박사

By 안 인규

여기, 어쩐지 광기까지 느껴지는 어느 물리학자의 좌우명이 있다.

“남이 아는 것은 나도 알아야 한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남도 몰라야 한다”

그는 남들의 연구를 뒤쫓는 게 아니라 스스로 물리학의 새로움을 개척하고 싶어 했고, 그 뜻대로 물리학계를 선도했다.

생존해 있었다면 노벨 물리학상 수상은 당연했을 것이라는 소리를 듣는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의 좌우명이다.

KBS 보도 화면 캡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투하했던 원자폭탄을 개발한 세계적인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내 밑에 아인슈타인과 이휘소가 있었지만, 이휘소가 더 뛰어났다”

실제 197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압두스 살람과 스티븐 와인버그는 각각 이런 수상소감을 남겼다.

“현대 물리학을 10여 년 앞당긴 천재 이휘소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어 부끄럽다”

“내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이휘소의 공이다”

KBS 보도 화면 캡처

이휘소 박사의 업적은 다음과 같다.

1965년 미지의 입자에 처음으로 ‘힉스’라는 이름 명명

1971년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를 통해 소립자 물리학의 표준모형을 확립

1974년 ‘참(Charm)입자에 대한 탐색’으로 기본입자 중 하나인 ‘참’ 쿼크 존재를 예견

이휘소 박사의 이론대로 2년 뒤 이 쿼크와 관련된 소립자를 발견한 물리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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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휘소 박사의 논문들은 전 세계에서 1만 3,400회 넘게 인용됐다. 이휘소 박사만큼 단일 논문에 인용된 수가 많은 입자물리학자는 찾기 어렵다.

물리학을 넘어 세계 과학계가 극찬한 이휘소 박사는 역사상 최고의 천재 과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세계 최고 물리학 명문대인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물리학과 복도에는 이론물리학자 10여 명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그 한가운데에 이휘소 박사가 위치하고 있을 정도다.

그런 이휘소 박사의 별명은 ‘팬티가 썩은 사람’이었다. 옷 갈아입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연구에 몰두한다고 생긴 별명이었다.

한 번은 동료와 점심을 먹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자 연구실로 돌아가 단 이틀 만에 논문을 완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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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이휘소 박사 본인은 노벨상을 타지 못했다. 노벨상은 원칙상 죽은 사람에게는 상을 수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휘소 박사는 1977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1977년 6월 16일, 이휘소 박사는 미국 콜로라도에서 열리는 학술대회 참석을 위해 이동 중이었다.

다른 차선을 달리던 36톤 대형 유조차가 바퀴가 터져 미끄러지며 이휘소 박사의 차를 덮쳤고, 이휘소 박사는 안타깝게도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