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23년간 세상을 떠나 강원도 정선 깊은 산에서 살아온 자연인 아저씨가 있었다.
자연인을 넘어 원시인에 가까운 아저씨는 자신을 ‘김씨돌’이라고 소개했다.
“혹시 세상에 기분 나쁘고 때려죽이고 싶은 사람 있고 미운 사람 있거들랑 다 여기 놀러 오시오”
아저씨는 옷을 벗어 던지고 소나무를 껴안으며 나무의 숨소리를 느끼기도 하고, 길을 가다 갑자기 구덩이에 머리를 묻고 흙냄새를 맡기도 했다.
어린아이처럼 괴짜 같은 모습이었지만 인근 산골 마을 주민들은 순하고 인정 넘치는 씨돌 아저씨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한 주민은 씨돌 아저씨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겨울에 눈이 오면, 고라니 같은 게 지나가잖아요.
그러면 누가 고라니를 따라가 잡을까 봐, 일부러 그 발자국 다 지운 사람이에요. 따라다니면서.
고라니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그런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순진무구한 자연인, 씨돌 아저씨의 인생은 사실 너무나 기구했고, 너무나 놀라웠다.
1987년, 군대에서 실시된 최초의 부재자 투표에서 여당 대표를 뽑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상병이 구타당해 숨지는 억울한 죽음이 발생했다.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고 같은 해 6월 민주화 운동에서 숨진 열사들의 부모님들을 챙기며 누구보다 앞장서 투쟁하고 정의를 위해 몸 바쳤던 청년이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청년 요한의 노력 끝에 의문사 진실이 인정됐고, 그 후 요한은 숨진 상병의 어머니를 안아준 뒤 홀연히 사라졌다.
“요한이가 우리 집에 와서, 대문 앞에 서서 나를 한 번 안아 주더라고. ‘어머니 고생 많이 했다’고…”
민주화 열사 故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또한 “요한 씨는 우리들의 투쟁 현장 제일 앞에서 우리를 인도한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요한이를 처음에 만났을 때는 ‘저런 미친놈이 있대?’라고,
즈그 식구는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는데 남의 일만 갖고 저렇게 몸을 다 그냥 부수고 있구나.
요한이 제일 앞장서 갖고 제일 많이 두들겨 맞는 놈이야. 고마웠지”
시간을 돌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당시,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한달음에 달려와 구조 현장에 매달린 사람이 있었다.
“순수해 보이는 사람이 구조 현장에서는 굉장히 강하게 매달려서 목숨 걸고 했어요”
그는 생존자를 구출하고 언론사에 재난구조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고 호소하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후 사고가 수습되고 기자들이 취재하려고 하자 “전 괜찮아요”라는 말과 함께 또다시 홀연히 사라졌다.
그는 바로 청년 요한이었다.
독재정권과 민주화 움직임 속에서 목숨을 잃은 젊은이들의 가족을 돌보며 진실을 밝히려 했던 청년 요한.
누군가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마다 소리 없이 나타나 몸을 불사르다 조용히 사라지던 요한.
그리고 씨돌은 바로 그 요한의 다른 이름이었다.
총명하게 눈을 빛내던 요한, 그리고 해맑게 웃던 씨돌 아저씨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민주화 운동 당시 고문과 폭행의 후유증으로 뇌출혈에 시달리다 쓰러진 요한, 씨돌 아저씨는 병원에서 기초생활수급자인 본명 ‘용현’으로 살고 있다.
“우측 반신마비에 언어장애로 소통이 안 되고 더 이상 뇌의 회복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정작 본인에게 도움 되거나 관계되는 일은 없었는데도 왜 그렇게 희생적인 삶을 살았을까.
이름도, 명예도 없이 잊혀간 삶은 어땠을까.
요한, 씨돌, 용현 아저씨는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왼손으로 종이에 썼다.
“인간(人間)으로서 당연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