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23년에 태어났다.
사람들은 내 이름이 ‘딜쿠샤’라는 걸 잘 모른다.
동네 사람들은 나를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고 부른다.
내가 있는 곳은 서울 한복판 종로.
내가 서울 종로 이 언덕 위에 맨 처음 지어진 집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바다 건너 미국 땅에 나의 오랜 친구 브루스가 살았다. 브루스는 평생 나를 그리워했다.
“1940년 어느 날, 어머니가 딜쿠샤 정원으로 나를 부르셨어.
어머니는 말씀하셨어. ‘네가 항상 돌아와야 할 곳은 이곳이란다’
그땐 내가 그 집을 다시 못 볼 줄 몰랐는데…
결국 그렇게 되고 말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브루스의 어머니인 메리와 아버지인 알버트가 나의 첫 주인이었다. 봄처럼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나보다 500년 더 이 언덕 위에 살았던 은행나무는 그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태어난 건 이 은행나무 덕분이었다.
100년 전, 인왕산을 산책하던 메리와 알버트는 이 은행나무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그래서 그 옆에 그들의 보금자리를 지었다.
그들은 내게 ‘딜쿠샤’라는 이름을 주었다.
딜쿠샤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희망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메리가 인도로 신혼여행을 갔던 기억을 떠올려 딜쿠샤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나는 일본이 지배하던 한국 땅에 서양인 부부가 짓고 인도 이름이 붙은 기이한 운명으로 태어났다.
그때의 나는 층마다 세 개의 벽난로를 품고 있었고 넓은 거실을 갖고 있었다.
나의 첫 안주인이었던 메리는 영국의 배우이자 화가였다.
메리는 미국인이었던 알버트와 결혼하면서 알버트를 따라 한국 땅에 정착했다.
그들의 하나뿐인 아들 브루스는 3·1운동 바로 전날, 한국의 독립선언서 위에서 첫 생을 맞았다.
“나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태어났어.
일본 경찰들이 그날 병원을 급습했어.
간호사들이 경찰이 오는 걸 보고 인쇄 중이던 독립선언서를 감추려고 했어.
간호사가 문서를 내 침대 밑에 집어넣었어.
일본 경찰은 우는 아기 밑에 독립선언서가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고.
그 뒤에 아버지가 병원으로 나를 보러 왔어.
먼저 어머니를 보고, 그다음 나를 보고, 나를 들어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어.
내 밑에서 한국의 독립선언서를 발견했기 때문이었지..”
기자였던 알버트는 아들의 요람 밑에서 발견한 독립선언서를 일본 경찰 몰래 해외로 빼냈고 세상에 알렸다.
그렇게 한국과 독특한 인연을 맺으며 인생을 시작한 브루스는 내 품 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은행나무 옆으로 넓게 펼쳐진 정원이 브루스의 놀이터였다. 한강을 비롯해 서울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내가 태어난 1923년 그때. 인왕산 언덕 위에는 나 홀로 서 있었다. 나는 언덕 위에서 이 땅의 원래 주인이었던 한국인들을 지켜보았다.
흰옷을 입은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에게 지배당하고 있었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젊은이들이 총독부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려왔다.
내가 태어나던 그해, 1923년에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젊은이가 일본군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일본인들은 한국에 온 후 이 나라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어.
일본인들은 꼭대기에 있었고 한국인들은 밑바닥에 있었어.
한국인들이 중간 위치에라도 오르려면 일본인이 되어야만 했지.
하지만 많은 한국인은 일본인처럼 되고 싶어 하지 않았어.
저분도 그중 하나였고”
김주사는 나를 돌보던 한국인 집사였다. 고종의 통역관으로 일했던 김주사는 나라를 빼앗긴 후 몰래 독립운동을 도왔다.
알버트는 그런 김주사를 지지했고 존경했다.
알버트가 한국 땅을 돌아다니며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를 쓰는 동안 메리는 그녀가 지켜본 한국인들의 표정을 그림으로 그렸다.
알버트, 메리, 브루스가 나와 함께 살지 못하게 된 것은 전쟁 때문이었다.
브루스는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군대에 입대했고 그 이후 나에게 돌아오지 못했다.
그 전쟁으로 나의 운명도, 메리와 알버트의 운명도 바뀌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미국인 요주의 인물이었던 알버트를 감옥에 가두었다. 메리는 6개월 동안 가택 연금된 채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그리고 결국 1942년, 그들은 이 땅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다 1945년 8월 15일. 전쟁은 일본의 패전으로 끝났다.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태극기가 자유롭게 거리에 휘날렸다.
이 땅이 원래 주인에게로 돌아가자 나도 나의 주인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말았어.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만약 자신이 한국이 아닌 곳에서 죽으면 자기를 한국 땅에 묻어달라고 했어.
그곳은 아버지가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나라였고 아버지가 진정으로 기쁘게 살았던 나라였기 때문이야..”
알버트는 그의 소원대로 서울 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나는 그 뒤로 방치된 채 100년 동안 이 언덕 위에 살아남았다.
브루스는 2006년, 66년 만에 나를 보러 왔다. 그리고 2015년에 세상을 떠났다.
누군가에겐 희망의 궁전이었고 누군가에겐 고향이었던 나, 딜쿠샤.
나는 201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됐고 이제는 역사 전시관이 됐다.
위는 지난 2013년 방영된 KBS1 ‘다큐 공감’의 내용을 재구성한 글이다.
딜쿠샤는 현재 역사 전시관으로 탈바꿈해 시민들에게 무료로 개방되고 있다.
덧붙여 올해 3·1절 102주년 기념행사에는 메리와 알버트의 손녀, 제니퍼 테일러가 참석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