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필리핀 혼혈 아랍인”으로 위장해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한 북한 간첩

By 윤승화

1990년, 단국대학교는 아랍 역사 연구를 위해 현지인 사학과 교수를 초빙했다.

초빙된 교수는 필리핀인 아버지와 레바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무하마드 깐수(Muhammad Kansu) 교수였다.

무하마드 교수는 한국에 들어온 뒤 실크로드를 비롯한 동서 문명 교류사 분야에서 독보적인 권위자 역할을 했다.

교양 역사 프로그램 고정 자문위원으로 활약하고, 신문 사설 등 저술 활동도 활발히 했다.

당시 KBS 보도 화면 캡처

한국외대에서도 강의를 했고 동시에 연구에 매우 매진해서, 무하마드 교수의 연구실은 항상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워낙 저명한 권위자이다 보니 1991년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무하마드 교수의 글이 실렸다.

아랍어, 필리핀어, 영어, 일본어, 불어, 독일어 등 7개 국어를 할 줄 알았던 무하마드 교수는 말투가 어눌하기는 했지만 한국에 온 지 불과 몇 년 만에 한국어도 능통하게 구사했다.

무하마드 교수는 또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로 매주 금요일마다 기도를 드렸다. 성품도 선량해 학생들에게 인기 있었다.

당시 MBC 보도 화면 캡처

그러던 1996년 12월, 당시 안기부에서 무하마드 교수를 잡아갔다.

죄명은 간첩 혐의였다.

무하마드 교수의 이름, 국적, 종교 등 모든 것이 거짓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본명은 정수일. 북한 간첩이었다.

당시 체포 사진 / 연합뉴스

다소 이국적인 외모 덕분에 아무도 무하마드 교수가 정수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수일의 위장이 철저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만나 결혼한 아내조차 정수일의 정체를 몰랐는데, 잠꼬대마저 아랍어로 했기 때문이었다.

체포된 순간까지 어수룩한 한국어를 쓰던 정수일은 그 이후부터 아주 멀쩡한 한국어를 구사해서 수사관들을 놀라게 했다.

정수일은 자신이 7개 국어를 할 줄 안다고 했는데 이 역시 거짓말이었다.

당시 KBS 보도 화면 캡처

실제로는 조선어와 한국어를 포함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 아랍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페르시아어, 마인어, 필리핀어 총 13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의심을 받을까 봐 7개 국어로 줄여 말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공개된 바에 따르면, 정수일이 간첩 활동을 하며 북한에 보낸 정보들은 도움이 될 만한 가치가 거의 없었다.

남한이 북한보다 아랍 역사 연구가 잘 돼 있다며 북한이 본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아랍 연구 관련 정보만 많이 보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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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도 “이딴 걸 뭐 하러 보내냐”고 짜증을 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정수일은 한국에 전향서를 내고 간첩죄로 복역하다가, 그동안의 학술적 성과와 적극적으로 간첩 행위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이 인정돼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출소 후 정수일은 아랍 연구 활동을 계속하면서 한국과 중동 국가의 관계 개선에 많은 공을 세웠다.

정수일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도 권위 있는 이슬람권 역사학자로 극진하게 대접받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