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의 외동딸은 6·25전쟁에서 북한군 벌벌 떨게 만든 ‘명사수’가 됐다

By 김연진

1931년 2월 20일, 중국 베이징에서 독립운동가 오수암 선생의 외동딸이 태어났다. 딸 이름은 오금손.

안타깝게도 딸이 태어난 지 7일 만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는 일본군에 잡혀 숨졌고, 어머니도 사살당했다.

고아가 된 오금손은 아버지의 친구에게 맡겨져 생활해야만 했다. 그러나 오금손이 13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친구마저 세상을 떠났다. 오금손은 떠돌이가 됐다.

부모님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오금손도 그 뜻을 이어가기 위해 한국광복군에 입대했다.

연합뉴스

그렇게 항일독립운동을 하면서 사격술을 익혔다.

광복 이후, 오금손은 간호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병원에서 근무하며 평범한 삶을 보냈다. 6·25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전쟁이 발발하자 오금손은 국군에 자진 입대해 간호장교로 활약했다. 조금이라도 나라에 보탬이 되고자 국군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위기가 찾아왔다. 1950년 8월, 포항 형산강 지구 전투에서 부상자들을 간호하고 있던 오금손의 눈앞에 북한군이 나타났다. 북한군이 국군 야전병원을 기습한 것이다.

간호장교 자료 사진 / 서경덕 교수 페이스북

북한군 1개 소대 11명이었다. 당시 개인무장 상태였던 오금손은 소총을 꺼내 총격전을 벌였다.

그녀는 홀로 북한군 6명을 사살했다. 나머지 북한군 5명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자 한국광복군임을 몸소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오금손은 훈장을 받고 2계급 특진해 소위에서 대위가 됐다.

1952년에는 북한군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이때 치아, 손톱, 발톱을 뽑히면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북한군은 고문과 회유를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오금손은 이에 굴하지 않고 탈출할 기회만 엿봤다. 그러다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탈출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고, 허리에도 파편이 박히는 등 큰 부상을 입었다.

KBS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으나, 부상 후유증으로 의가사제대를 하게 됐다.

오금손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끝까지 나라를 위해 움직였다. 윤봉길 기념사업회, 전쟁기념사업회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또 전국을 누비며 군인, 학생들을 상대로 ‘호국 강연’을 해왔다.

특히 전방 백골부대를 찾아 직접 준비한 음식을 나눠주며 군인들을 독려했다. 이때 ‘백골 할머니’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지난 2004년 11월 4일 심장 질환으로 별세했다. 오금손은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나라를 위해 인생의 모든 걸 바쳤다.

서경덕 교수 페이스북

국가보훈처는 오금손을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하며 그녀의 업적을 기렸다.

독립운동가 오수암 선생의 외동딸, 한국광복군으로 활약한 항일투쟁가, 6·25전쟁에서 북한군을 벌벌 떨게 만든 명사수, 국군 부상병을 치료한 간호장교, 죽는 날까지 나라를 위해 힘쓴 대한민국의 영웅.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오금손 대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