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강제노역소에서 2년 동안 가혹한 고문을 겪은 여성이 약혼자의 필사적 노력 끝에 구조됐다. 20년 전 일어난 이 사건은 지금도 비슷한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 51세가 된 중국계 호주인 잉 리(Ying Li)는 지난 2001년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박해받았다.
파룬궁은 1990년대 말 중국에서 크게 유행한 기공 수련법이다. 파룬따파(法輪大法)로도 불리며 진실, 선량, 인내를 원칙으로 몸과 마음을 수련한다. 건강에 효과가 뛰어난 것이 입증돼 1997년 중국 정부 추산 수련인 숫자가 7천만 명 이상으로 집계됐다.
그런데 2년 뒤인 1999년 4월 25일, 당시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자 장쩌민은 다른 지도자급 인사들에게 문서를 보내 “파룬궁을 없애야 한다”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장쩌민이 제시한 이유는 수련자들이 노동자, 농민에서부터 지식인, 군인, 당 간부들까지 각계각층에 많다는 것이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물질주의, 무신론’ 같은 공산당 이념보다 파룬궁이 원칙으로 삼은 진실, 선량, 인내를 중국인이 더 선호해선 안 된다고 했다.
그의 주장에 대해 당시 다수의 지도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고 권력을 쥐고 있었던 그가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결국 탄압은 국가 정책으로 채택됐다. 1999년 7월 20일부터 중국 전역에서 대대적인 체포 작전이 시작됐다.
하지만 “3개월 만에 파룬궁을 없앨 것”이라던 장쩌민의 계획은 생각만큼 순조롭지 못했다. 수련자들은 생각보다 쉽게 굴복하지 않았고, 일반 중국인들은 공원에서 건강 체조하는 사람들이 왜 잡혀 들어가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2001년 1월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5명이 분신자살로 항의하는 사건을 조작해냈다.
나중에 국제단체의 조사를 통해, 분신자살한 사람들은 수련생이 아니라 감옥에 수감돼 있던 범죄자들이었음이 드러났지만, 당시 이 사건은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중국의 평범한 시민들은 이 사건을 ‘잘못된 신앙에 빠진 이들이 국가에 저항하며 분신한 사건’으로 생각했고 파룬궁을 기피하고 혐오하기 시작했다. 이후 파룬궁 탄압도 급물살을 탈 수 있었다.
리씨가 체포된 것도 바로 2001년 1월이었다. 그녀는 공안에 납치돼 교육 센터로 보내졌다. 이곳은 고문과 정신 세뇌를 통해 수련을 포기시키는 시설이다.
그녀는 파룬궁의 결백을 주장했다. 파룬궁은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정부의 탄압과 경찰의 체포는 부당하다는 의미로 음식을 끊었다.
그렇게 한 달을 버텼다. 기간을 정해두고 음식을 끊은 것이 아니라, 체포가 잘못됐음을 인정하고 풀어줄 때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로 끝까지 버틴 것이었다.
센터 측은 리씨의 생명이 위독해지자, 코로 음식물을 주입하며 억지로 먹여 살리는 방식으로 고문했다. 그렇게 4개월 만에 풀려난 그녀는 다시 약 반년 만인 그해 10월 또 체포됐다.
어렵게 일상을 회복했지만, 회사일로 항저우를 방문했다가 또 붙잡힌 것이었다.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였다. 그녀는 상하이 칭송 강제노역소(중국에서는 ‘노동교양소’라고 부름)로 보내졌다.
리씨는 당시 일을 회상하며 “그곳에 2년간 수감됐다. 체포 사유란에는 ‘기타’라고 적혀 있었다”며 “날 체포할 마땅한 법적 근거가 없었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그곳에선 수갑을 찬 채 3일간 철문에 묶이거나 6개월간 독방에 갇히기도 했다.
수련을 포기하겠다는 각서에 서명하면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록 몸은 묶였을지언정 자신의 정신과 마음마저 그들에게 꺾일 수는 없었다.
악랄한 공안들은 아무리 괴롭혀도 수련을 포기하길 거부하는 그녀의 모습을 본 다른 수련자들도 용기를 얻을까 봐 두려워 그녀를 독방에 가두었다. 공안들은 1명을 포기시킬 때마다 상금을 받았다. 그들에겐 잉 리로 인해 돈벌이가 방해받는 일이 걱정이었다.
잉 리는 그것을 ‘신앙(信仰)’이라고 불렀다. 신앙은 보통 종교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믿고 우러러보는 것에 대한 흔들리지 않음을 가리킨다. 그녀는 진실, 선량, 인내를 원칙으로 삼는 일을 ‘반성하라’는 공안의 강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했다.
리씨는 “고문방법이 많기도 했다”며 “몇 시간 동안 아주 작은 의자에 앉게 했다. 엉덩이에 욕창이 생겼다. 때로는 몇 시간씩 서 있게 해서 발과 다리가 퉁퉁 부어 움직일 수도 없었다”고 직접 겪은 일들을 전했다.
이어 “전기봉으로 감전시키고 때렸다. 온몸에 성한 곳이 한 곳도 없을 정도였다”며 “차마 말하기 힘든 고문도 있었다. 신체적 고문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문도 심했다”고 말했다.
고문은 강제노역소에서 겪는 고통의 일부였다. 수감자들은 또한 매일 오전 7시부터 거의 자정까지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이렇게 생산된 제품을 판매한 수익은 공안이나 노역소 간부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리씨는 호주로 구출된 후 한 인터뷰에서 “상하이의 여성 강제노역소에서 이탈리아 유명 브랜드에 납품되는 인형을 제작하는 일을 했다”고 증언했다. 중국의 무섭도록 낮은 인건비에는 이러한 강제노역도 한몫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만든 제품 중엔 상하이의 속옷 브랜드 싼창(三枪·Three Gun)도 있었다.
불운 속에서도 그녀에게 희망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녀의 약혼자인 그랜트 리(Grant Lee)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호주 시민권자였기 때문이다.
약혼녀가 강제노역소에서 고난을 당하는 사이, 약혼자는 애끓는 심정으로 호주 현지에서 구명운동을 펼쳤다.
바로 풀려날 순 없었지만, 호주 정부가 호주 시민권자의 약혼녀가 중국 강제노역소에 갇힌 사건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은 리씨가 더 극심한 상황으로 몰리는 것을 일정 부분 차단하는 작용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약혼자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리씨는 중국 강제노역소에서 그가 보낸 약혼반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반지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에 위로가 됐을 뿐만 아니라 노역소 생활을 버틸 수 있는 용기를 북돋워 줬다.
리씨는 약혼자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결국 2003년 10월 15일 형 만료로 강제노역소에서 풀려났다. 중국에서는 형이 끝나더라도 무사히 석방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형이 연장되거나 귀가 후에 가택연금 당할 수도 있다.
또한 리씨를 중국에서 꺼내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약혼자는 ”그녀가 중국 국적이었기에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침 호주 현지 언론사들이 두 사람의 극적인 사랑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이 사건을 보도했다. 이를 계기로 약혼자는 호주 외무부 관리들과 만날 기회를 얻었다. 관리들은 성실하게 대화에 응해줬고, 중국 정부에 리씨에 대해 문의하기로 약속했다.
이후 몇 가지 어려움이 더 있었지만, 두 사람은 호주 의원들과 상하이 주재 호주 영사관 측의 도움을 받아 극복할 수 있었다. 결국 호주 비자를 받은 리씨는 중국으로 마중 온 약혼자와 함께 2003년 11월 29일 호주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또한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이유로 박해받은 리씨의 언니와 남동생도 구출돼 호주에서 난민 신분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호주로 탈출한 뒤 약혼자와 결혼한 리씨는 현재 슬하에 세 자녀를 두고 시드니에 거주하고 있다.
그녀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중국에는 여전히 수백만 명의 파룬궁 수련자들이 박해를 받고 있다면서 “나는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어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반인간적이다. 중국 공산당은 사람들을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한다. 머릿속까지 지배하려고 하기에 스스로 사고할 능력을 갖도록 놔두지 않는다. 신앙이나 신념, 종교를 탄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그랜트 리는 “세계인이 중국 공산당의 사악한 실체를 알아차리고 중국인을 포함해 더 많은 사람이 공산주의를 거부한다면 우리 세상은 더 평화로워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