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들이 1500년 동안 혼자 무령왕릉 지키던 ‘진묘수’ 발견하자마자 소름 돋은 이유

By 안 인규

“입구를 막은 돌을 빼내자 하얀 김이 쏟아져 내렸다. 돌을 다 치우자 진묘수가 있었다.

진묘수의 입술은 붉었는데, 무덤이 열리면서 바깥공기가 닿자 곧 붉은색이 사라졌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아주 작고 동그란 돌덩이가 1500년 동안 홀로 왕릉을 지켜낸 이야기다.

1971년 7월 5일, 충남 공주. 장마철 배수로 공사를 하던 인부 한 명이 삽질을 하다 느닷없이 뭔가가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벽돌이었다.

연합뉴스
국립문화재연구소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며 땅을 파기 시작했고, 이윽고 벽돌로 만든 아치 모양의 지하 무덤 입구가 드러났다.

무덤 입구를 막고 있던 벽돌들을 빼냈다. 사람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을 때, 제일 처음 사람들을 맞이한 것은 작고 동그란 돌덩이 하나였다.

높이 31cm, 길이 50cm, 너비 22cm로 작디작은 체구. 올망졸망한 눈에 헤벌레 한 입, 짧고 통통한 다리에 둥글둥글한 엉덩이까지.

꽤 귀엽게 생긴 돌덩이는 무덤 통로 한가운데 자리 잡은 채 바깥쪽을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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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덩이 앞에는 묘비석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무덤에 묻힌 주인공이 백제 제25대 임금 무령왕과 그 왕비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렇듯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매우 드물게 무덤 주인이 무슨 왕인지 명시된 무덤으로 세계사에 이름을 남겼다.

한국사로 봐서도 무령왕릉은 의미가 컸다. 다른 백제 왕릉들은 이미 과거 일제강점기에 전부 발굴, 도굴당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공주에는 악명 높은 일본 고고학자 가루베 지온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가루베는 백제 무덤을 1,000곳 넘게 불법으로 조사하고 파헤쳤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발굴한 유물들을 일본으로 빼돌렸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그런 가루베가 끝까지 발견하지 못한 게 바로 무령왕릉이었다. 무령왕릉은 15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어느 누구의 발길도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돌덩이로 돌아가 보자.

작고 동그란 돌덩이의 이름은 진묘수. 무덤을 지키는 전설 속 동물이다. 당시 현장에 있던 발굴단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했다.

“입구를 막은 돌을 빼내자 하얀 김이 쏟아져 내렸고 돌을 다 치우자 진묘수가 있었다. 처음 목격했을 땐 입술이 빨간색이었는데 무덤이 열리면서 공기가 통하기 시작하자 곧 색이 산화돼 날아갔다”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나쁜 귀신을 쫓는 의미로 입술을 붉게 색칠했을 터.

그렇게 왕과 왕비의 무덤을 1,500년 간 홀로 열심히 지켜낸 진묘수는 제 역할을 다한 뒤 화장 전의 입술 색깔로 돌아갔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진묘수는 무령왕릉 진묘수가 유일하다.

안타깝게도 그런 진묘수도 지키지 못했던 것이 있다.

무덤 바닥에 풀뿌리와 얽혀 있는 금제 관식 / 국립문화재연구소

다름 아닌 처참한 발굴 과정이었다.

왕릉에서는 금제 왕관 등 값진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진묘수가 홀로 1500년간 지켰던 왕릉의 유물은 총 4,600여 점에 달했다.

당시 발굴단은 ‘이건 대박’이라는 태도로 유물을 공사용 삽으로 퍼서 포대 가마니에 담아 날랐다. 작은 크기 유물들은 급하게 자루에 쓸어 담았다.

최소 몇 년에 걸쳐 진행해야 할 작업이었지만, 불과 12시간, 하룻밤 안에 발굴이 끝나버렸다.

트위터 캡처

이 와중에 도처에서 몰려든 기자들은 어떻게든 무덤 안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는다고 난리법석을 피웠다.

몇몇 기자는 관계자를 폭행했으며, 몇몇 기자는 유물을 파손했다.

심지어 기자 한 명은 가까이서 촬영하려고 허락 없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가 청동숟가락을 밟아 부러뜨리기도 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금은 비공개된 무령왕릉 내부 / 연합뉴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발굴 책임자를 호출했다. 담당 책임자는 유물 20여 점을 보자기에 싸서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갔다.

유물들을 구경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팔찌 하나를 맨손으로 들어 “이게 순금인가?”라며 두 손으로 가운데를 접었다 폈다.

이 팔찌는 무령왕비가 살아생전에 차던 팔찌였다.

작디작은 진묘수가 1500년을 열심히 지켜냈던 무령왕릉 발굴이 한국 고고학 역사상 최고이자 동시에 최악의 사건으로 꼽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