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각종 고서에는 약속이나 한 듯 키가 한 척(약 30cm)이 안 되는 소인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며 서양문화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1. 북송(北宋, 960~1126년)의 유부(劉斧)가 지은 ‘청쇄고의(靑瑣高議)’ 중에 고언(高言)이라는 사람의 말이 기록돼 있다.
그는 자기가 페르시아 남쪽의 임명국(林明國)에서 바닷길로 중국으로 돌아올 때 소인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중간에 어떤 나라가 있는데 그 이름은 모르나 사람의 키가 몇 촌(1촌은 약 3cm)이고 나갈 때는 반드시 서로 연락한다. 수 척의 크기의 짐승들이 때로 그 사람들을 잡아먹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갈 때는 반드시 서로 연락한다. 뱃사공이 소인 몇 명을 싣고 돌아왔는데 도중에 죽었다.”
이 기록 중에서 몇 촌 크기의 소인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외출할 때는 반드시 서로 연락을 하며 단체행동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짐승들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시대 ‘태평광기(太平廣記)’에도 역시 이런 기록이 있다는 것이다. 서북해에 학민국(鶴民國)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사람들도 키가 몇 촌밖에 되지 않으며 역시 학에게 잡아먹힌다는 내용이다.
사실 고대 그리스 문화에서도 유사한 기록이 있다. 고대 희랍인들은 늘 이렇게 묘사했다. “일종의 난쟁이가 있는데 키가 사람의 팔뚝 정도(30cm)이며 키가 작기에 늘 기러기 등 새들에게 잡아먹힌다.”
예를 들면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에서는 피그미라는 난쟁이들이 나온다. 이들은 자신들의 곡식을 가져가려는 새들과 치열한 전쟁을 벌이다 결국 소멸됐다. 여자들은 세살에 임신하고 열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 이들의 키는 중국의 고서적에서 말하는 길이가 수 촌인 사람들과 비슷하다.
2. 명나라 때 이부좌랑 겸 한림원시독 관직을 지낸 고기원(顧起元)이 쓴 ‘객좌췌어(客座贅語)’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명나라 융경 연간(1567-1572년)에 고기원과 같은 고향 사람인 금한천(金漢泉)은 한때 바다에서 떠다니던 소인 두 명을 얻은 적이 있었다.
그는 그들을 네모난 조롱에서 키웠다. 두 소인들 중 하나는 노부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젊은 남자였는데 그들 관계는 모자인 듯 했다.
그들의 키는 한 척이 약간 넘었으며(여기의 한 척은 명나라 시대의 한 척으로서 30cm보다 짧은 약 23cm이다), 이 두 소인이 말하는 음성은 마치 제비 같았다.
나중에 소인 중에 남자가 죽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슬피 울었으며 흰천으로 머리를 둘러 마치 상복 같은 차림을 했다. 나중에 이 노부인 역시 죽었다. 금한천의 딸은 고기원의 처남 왕효렴(王孝廉)의 아내였다. 때문에 고기원은 여러 차례 이 두 소인을 직접 보았으며 결코 남에게 주워들은 말이 아니다.
3. 명나라 서복조(徐复祚)가 지은 ‘화당각총담(花當閣叢談)’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구중(衢中) 상인 호수(胡秀)라는 사람이 소인 한 명을 갖고 군대에 들어왔는데 키가 한 척으로 남자이며 눈과 수염, 머리카락 등이 다 갖춰져 있었다. 주홍색 조롱에 넣고 풀로 자리를 깔아 물과 쌀로 키웠다. 입으로는 ‘지지’하는 소리를 가끔 냈으며 말을 할 줄 몰랐다. 침대를 만들어주었더니 피곤하면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