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100주년 기념일을 이틀 앞둔 2월 27일, 100년 전 일본 군인들이 마을 주민을 교회에 모아놓고 불을 질러 20여 명을 학살한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의 순국 현장에서 일본인 개신교 목사와 신도 17명이 엎드려 사죄의 절을 올렸다.
이날 일한친선선교협력회 방한단을 안내한 이는 서울일본인교회에 파송돼 39년째 사역하는 요시다 고조(吉田耕三·78) 목사.
‘사죄와 화해의 선교사절’로 불리는 그는 일본 개신교 신자나 학생이 방한하면 관광객이 흔히 찾는 명승고적이나 쇼핑센터 대신 이곳 제암리를 비롯해 탑골공원,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안중근의사기념관, 독립기념관, 판문점 등으로 손을 잡아 이끈다.
일본 총리나 외무상·문부상이 바뀔 때마다 과거사 반성과 사죄를 촉구하는 편지를 띄우고, 일본 유력 언론에도 수시로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글을 보낸다.
그를 만나기 위해 3월 29일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의 서울일본인교회를 찾았다. 백석빌딩 4층에 자리 잡은 예배당 문을 열자 자그마한 체구의 은발 노신사가 반갑게 맞는다. 정면 중앙에 대형 십자가가 보이고 그 옆에 ‘3·1운동 100주년 기념식’과 ‘대성회(大聖會)참가방한단’을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4월 15일은 제암리 학살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일제의 만행을 상징하는 사건이죠. 사죄의 뜻으로 1970년 일본 교회와 사회단체가 성금 1천만 엔을 모아 제암리에 새 교회를 지어줬습니다. 희생자 유족 마지막 한 분까지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사죄하고 또 사죄해야죠.”
요시다 목사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최근 일본의 행보를 보면 반대의 길을 걷는 느낌이다.
한국 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두고 일본 정부와 집권 자민당은 거세게 반발하며 ‘한국과의 단교’까지 거론하는가 하면 내년부터 쓸 초등학교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의 고유 영토이고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내용을 수록하기로 했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 개인 보상을 제외한 것이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겁니다. 일본 정치인들은 오만합니다. 제가 아무리 얘기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미국 대통령은 초등학생이 쓴 편지에도 손수 답장한다는데 말이죠. 그래도 저를 비롯한 기독교인과 일본의 양심세력이 꾸준히 기도하고 항의하면 열매를 맺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의 편지에 응답한 유일한 사례가 있다. 그가 한국어를 배우며 한국행을 준비하던 1970년대 말 일본 공영방송 NHK에 편지를 보내 “영어는 물론 독어·불어·스페인어 강좌를 방송하면서 가장 가까운 나라 한국어 강좌는 왜 없느냐”고 따지자 NHK 교양부장이 전화를 걸어와 “한국어 강좌라는 제목을 달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반발하고 조선어 강좌라고 하면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 항의해 곤란하다”고 해명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해 “남북한이 모두 쓰는 한글 강좌라고 하면 될 것”이라는 지혜를 얻은 뒤 조언하자 NHK 교양부장이 대단히 기뻐하며 1981년 한글 강좌를 개설했다고 한다.
요시다 목사의 어릴 적 꿈은 경찰관이 돼 범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학교 때 세례를 받고 범죄 없는 세상을 만들려면 하나님의 믿음을 전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해 진로를 바꿨다. 도쿄의 신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나고야에서 목회에 나섰다.
요시다 목사가 맨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것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대규모 선교대회 ‘엑스플로 74’가 열린 1974년 8월이었다. 밤새도록 열정적으로 신앙 체험을 고백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한국 신도들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경이롭고도 감동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이 같은 한국 교회의 저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의문을 품고 돌아갔다가 몇 차례 더 한국을 찾고 역사를 공부한 끝에 3·1운동에서 비롯됐다는 결론을 내렸죠. 민족을 말살하려는 혹독한 식민통치를 겪으면서도 평화적으로 독립과 해방을 외친 경험이 발전의 토대가 됐다고 봅니다.”
한국에 정착한 것은 1981년부터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 목사들이 1975년부터 재한 일본인을 대상으로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는데, 목사들이 연로해 하나둘씩 은퇴하다 보니 일한친선선교협력회를 이끌던 모리야마(森山) 목사에게 일본인 목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요시다 목사는 전화로 들은 파송 권유가 하나님 음성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누나는 “한국 사람들이 해코지할 것”이라며 한사코 말렸다. 그러나 노부모는 “네 결심이 굳다면 굳이 반대하지 않겠다”고 했고, 아내와 어린 두 딸도 흔쾌히 따라나섰다.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외국인이어서 차별을 겪은 경험이 없느냐”고 묻자 “오히려 고마운 기억이 훨씬 많다”며 손사래를 쳤다.
아내 야스코(泰子) 씨가 큰 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교우들의 도움으로 완쾌됐고, 라디오 방송에 가족이 함께 초대돼 딸이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하자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선생님이 통역까지 데리고 와서 무료로 가르쳐줬다고 한다.
서울일본인교회는 지금까지도 일본인 목사가 이끄는 유일한 교회다. 처음엔 예배당 건물이 없어 종로5가 연동교회 교육관을 빌려 예배를 올렸다. 한국인 남성과 결혼했다가 혼자가 된 일본인 여성이 성수동 4층짜리 건물 가운데 맨 위층을 교회에 헌납해 1992년 둥지를 틀었다. ‘백석'(白石)이란 빌딩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흰 돌’, 즉 머릿돌을 뜻하기도 하고 예배당 기부자 남편의 성이 백씨여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주일 예배 때 출석하는 신도는 30∼40명에 이르는데, 일본인 말고 한국인도 있다. 요시다 목사가 일본어로 설교하면 봉사자들이 돌아가며 한국어로 동시통역한다. 매주 수요일에는 기도회와 성서연구 모임이 진행된다. 일한친선선교협력회가 운영비를 지원하며 신도들의 헌금은 전액 한국교회순교자유족회와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에 기부한다. 요시다 목사는 한국성서대에서 오랫동안 일본어를 가르쳐왔고 전국의 여러 교회 등에 초청받아 설교와 강연을 하고 있다.
숙명여대 사학과 이만열 교수의 제자로 위안부 주제의 졸업논문을 쓴 큰딸 노리코(範子) 씨는 판문점을 보러 온 일본인 신학생 히라시마 노조미(平島望) 씨와 결혼했다. 사위와 큰딸은 지금 서울일본인교회의 부목사와 전도사로 각각 일하고 있다. 작은딸 유카코(由架子) 씨도 요코하마에서 한국계 은행을 다니다 뒤늦게 일본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도사가 돼 목사인 남편과 함께 교회를 섬기고 있다.
요시다 목사가 가장 뿌듯하게 여기는 일은 작은딸이 다닌 일본 니가타의 게이와가쿠엔(敬和學園)고교 학생들과 인솔교사가 1999년부터 해마다 여름방학 때 ‘스터디 투어’란 이름으로 한국 역사체험을 오면 일제강점기 유적지를 안내하고 위안부 할머니 등을 만나게 해준 일이었다. 2002년에는 인천국제공항에서 배웅할 때 학생들이 느낀 점과 감사의 마음을 빼곡히 적은 태극기를 선물 받기도 했다.
“독도의 진실이나 일제강점기의 참상 등을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대다수 일본인은 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과 마주한다면 한일 관계도 잘 풀리리라 기대합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죠. 우리도 고난의 역사를 딛고 진정으로 거듭나기 위해 회개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선교사이기도 한 곽원일 감독은 요시다 목사의 행로를 더듬어보는 다큐멘터리 영화 ‘두 시선'(二つの視線)의 촬영을 마치고 후반 작업에 한창이다. 제이피프로덕션은 오는 29일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블러섬랜드에서 ‘한일간 사죄와 용서, 그리고 화해 교류회'(가칭) 출범식을 겸한 제작발표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