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막연히 ‘공산주의는 나쁜 것’ 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를 이야기 할 때 빈번하게 거론되는 ‘사회주의’는 도대체 뭘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유럽의 산업화 시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8세기 산업화와 자유주의 물결은 서구 사회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런 사회의 발전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체계를 더욱 확고히 했고 자본을 통한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됐으나 노동자들은 이전과 다르지 않은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고된 노동과 적은 보수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이런 현실이 과연 자유인가”라는 고민을 품게 됐다.
19세기 초 등장한 오웰, 생시몽, 푸리에 같은 사상가들은 막대한 권력을 가지게 된 자본가들을 관찰하며 새로운 이상적 사회 구상을 선전했다.
이들은 자본가들에게 감정적인 호소를 통해 “노동자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보자”고 했으며, 이러한 ‘공상적 사회주의’는 구상에만 그칠 뿐이었다.
이어 19세기 중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철저한 연구를 바탕으로 감성에 의존하던 사상과 차별화된 ‘과학적 사회주의’라 내세웠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서 드러나듯, 이들은 자신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가 자본가의 배를 불리기 위해 ‘고귀한 노동’을 바치는 현상은 잘못됐다며 노동자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20세기 초 이러한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노동자 계급은 ‘분노’‘투쟁’을 원동력으로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높아졌다.
자본주의 방식이 한계에 달하면, 자본가들을 제압하고 노동자 계급의 독재를 통한 이상세계 건설을 꿈꿨다.
또한 생산력과 사회구성원의 윤리의식이 향상되면서 노동자 계급의 독재도, 통제를 위한 국가도 필요 없어지리라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이들의 이론은 100년이 넘는 실험을 통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 증명됐다.
자본주의 사회는 건재했고,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노동자 위에 군림하며 자본을 독점했다.
이 과정에서 자본가뿐만 아니라 노동자마저 소외당하거나 심지어 비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모두 노동에서 해방된 이상적인 사회를 꿈꿨으나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인 ‘자유 경쟁 기반의 성장’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한계점이 지적된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가 낳은 노동자 투쟁에 의한 이상세계 운동으로 여기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주의는 사실상 공산주의 초급단계라고 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