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韻公演の演目は、中??統文化の?目を具現した?容になっている(大紀元)
[www.ntdtv.com 2013-04-14]
동아시아의 바다라는 재미있는 일본이 있다. 재미있다고 한 것은 대국인 중국의 이웃 나라이면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탓에 영향을 받는 방법이 인접한 국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중국문화를 수용한다는 측면에서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일본은 재미있는 방법을 취했다.
방법을 말하자면 ‘일본 가옥 툇마루 방식’과 유사하다. 즉, 밖에서 가져온 밭의 수확물을 툇마루에 한 번 두었다가 취사선택하거나 가공한 후 안으로 들여가는 두 단계 방식이다.
취사라고 해도 엄격하게 선별한 것은 아니다. 많은 것이 일본에 들어갔지만, 들어가지 않은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중국과 조선에서는 시험 지옥을 만들어낸 거국적 관리 등용 시험인 ‘과거’는 끝내 일본에 들어가지 않았다. 여성의 다리를 단단히 묶어 변형시키는 전족도 일본인이 흉내 내는 일도 없었다.
또한, 처음에는 `궁`이라는 형벌로 시작된 후 자발적으로 내시가 되기 위해 성기를 절단하는 것도 일본인의 역사에는 오르지 않았다. 이유를 한가지로 말하기 어렵지만, 일본과 중국 사이의 바다가 중국의 농도를 다소 희석하는 물리적 작용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어느 시기의 일본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적극 중국문화를 배웠다.
약 1300년 전. 시대로 말하면 나라(奈良) 시대부터 헤이안조(平安朝) 초기에 걸쳐 일본의 청년 관료들은 당나라의 율령 및 3성 6부제가 세계에서 가장 잘 갖추어진 제도라고 여겨 거친 동중국해를 결사적으로 건너가 중국에서 배워 일본으로 돌아갔다.
또한, 흔들리는 인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불교를 필요로 했다.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6세기 아스카 시대로 여겨진다. 당시 한반도를 통해 단아한 선을 가진 백제 불상이 일본에 소개되었지만, 그 후 일본의 불교는 느슨해져 세금 부담을 피하고자 너도나도 승려가 되는 등 국가 운영에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유학 승려를 파견하여 당나라 고승을 초빙하려고 한 것은 느슨해진 일본 불교계를 긴장시키기 위해 계율을 하사하는 사승(師僧) 즉 수계하는 스승이 필요했다.
이런 연유로 칸진화상(鑑?和上)이 거듭되는 난항을 겪으며 시력까지 잃어가며 일본을 방문해 나라의 땅에 쇼다이지(唐招提寺)를 연 것은 잘 알려졌다.
중국에서 일본이 받은 정신문화로 유교의 혜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일본은 과거제도가 없다. 입신출세 수단으로 미친 듯이 공부하는 형태는 유교의 스승인 중국과 유교의 우등생 조선에는 있어도 열등생 일본에는 제도로 정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인은 자녀 교육을 위해 유교 경전을 비롯한 한문 서적을 매우 속독시켰다. 아이들은 스승의 지도에 따라 등골을 펴고 큰 소리로 ‘자식 가라사대, 배울 때는 이것을 배운다.’를 읽었다.
그 자체가 아이에게 교육되어 사회적인 예의범절이 기본이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장자를 공경하고 좋은 친구를 얻고 가치가 있는 교제를 권했다. 이를 부연하여 인의예지신에서 충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지켜야 할 덕목을 심신에 주입하는 것이 적어도 일정한 교육을 받은 일본인의 모습으로 여겨졌다.
어른이 되어서도 학문을 연구할 때 필수 교양으로 첫 번째 과목이었다. 따라서 일본이 수용한 것은 유교라기보다는 유학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며, 이 또한 중국문화 수용에 있어서의 ‘툇마루 방식’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거듭 말하면, 일본인은 ‘외국어인 한문 서적을 일본어로 읽고 이해한다.’ 라는 세계에서 유례없이 대담하고 합리적인 독해법을 가지고 있었다.
한문 훈독은 한자를 문화유산으로 하는 국가 중에서도 특이한 재능이다. 단, 이런 훈독은 일본인의 피와 살에 녹아들어 그것이 외래문화라는 감각은 희미해졌다. 과거제도는 실시하지 않았지만, 일본인은 이렇게 중국 문화를 자국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일본인에게 그것이 행복인지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인에게는 외국문화인 중국문화의 수용과 정신 형성 과정은 이런 과정을 거쳐 일본인다움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확실하다.
에도시대 남송의 주희가 확립한 새로운 유학인 주자학은 도쿠가와 막부의 관학으로 여겨졌다. 사무라이 사회는 질서를 존중하고. 상하 신분을 분별해, 군신 관계를 엄격하게 하여 막부 체제운영에 질서를 잡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충의라는 덕목이 있다. 도쿠가와 시대의 충의는 영주와 가신과 관계에서 농축되었다. 전국시대와는 크게 다를 수 밖에 없는 평화 시대는 전쟁터에서 창으로 주군의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다. 단지, 주군에 얼마나 충성을 다하는가에 따라 칭찬도 받고 비난도 받았다.
에도시대 중기(中期) 겐로쿠 14년 3월 14일 (서기 1701년 4월 21일), 반슈 지방 아코번(赤?) 영주와 타쿠미두 죠구(?野?匠頭 長矩)가 에도 성 소나무 복도에서 키라 요시나카(吉良義央)와 칼부림을 한다. 궁 안에서 칼을 뺀 죄로 말미암아 타쿠미두(匠頭)는 그날로 할복자살하고, 아코번(赤?)은 관직에서 몰려난다.
1년 7개월 후에 아코번(赤?)낭인무사 47명이 키라 요시나카(吉良義央) 저택을 습격해, 주군의 원수를 쳐서 보기 좋게 숙원을 이룬다. 이 사건을 충신구라고 부르게 된 것은 가부키 공연의 영향이며, 더 많은 것을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망군(亡君)에 대한 충의를 관철한 무사를 무사도의 본보기로 칭찬하는 사고가 일본인 속에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유교의 덕목은 다분히 일본식으로 변화하면서, 일본인의 혈액에 녹아들었다.
공자를 모신 공자묘는 일본에도 여럿 있다.
현존하거나 복원한 것으로, 도쿄 유시마 성당, 토치기 아시카의 아시카가 학교와 같은 공자묘가 있어, 그 외, 한문서적을 배우는 학문소나 번교 등에 있었다.
아이즈번(?津藩)의 초대 영주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1611~1673)는 제2대 장군 도쿠가와 히데타다(?川秀忠)의 사생아이지만, 히데타다의 정실이 어리석다고 하여 호시나(保科)성을 받았다. 그로 인해 오히려 이 사람은 막부를 지탱하는 유능한 수뇌부가 되었다.
명군인 호시나 마사유키 공은 열성적으로 주자학을 추종했으며, 또한 아이즈번 내정 개혁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이즈번의 산업 진흥에 노력하고, 또한 번사의 자녀 교육에도 힘을 넣었다. 마사유키 공이 마련한 교육시설과 예능과 기술을 연마하는 당이 후에 번교 일진관이다.
그 성실과 정직을 표본인 듯한 마사유키 공은 제3대 장군 이에미쓰(家光) 이모의 남동생 임에도 이에미쓰에 대해 군신 관계를 철저하게 지켜 잘 섬겼다. 이에미쓰(家光)도 남동생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자신이 임종 때 머리맡에 불러 “도쿠가와 종가를 부탁한다.”라고 하면서 서거했다.
마사유키 공이 남긴 15항목으로 구성된 가훈(家訓)의 제1조는 “우리 자손은 도쿠가와 막부에 대해 충근(忠勤) 정진이다.” 이것이 역대 아이즈번 영주의 절대 계명이 되었다.
무거운 충의이다. 동란의 에도 막부 말기, 미노타 카스(美濃高須)에서 아이즈 마츠다이라(?津松平) 집에 양자로 들어간 마쓰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 1836~1893)가 가훈에 따라 교토(京都) 수호 직을 배명했다. 그러다가 후에 막부를 타도하는 전면에 나서게 되는 아이즈번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것은 역사의 잔혹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이 또한 아이즈번이 충의를 관철하기 위한 단 하나의 길이었다.
이야기를 되돌려 결론을 언급한다면, 한학의 교양이 높고 성실하고 근면하며, 가신이나 영내 백성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얻은 호시나 마사유키공의 예처럼 정통 중국문화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에게도 큰 혜택과 교육 효과를 주는 인류 공통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에서도 당 태종, 청나라 강희 같이, 정통문화를 존중하고 면학에 힘쓴 황제는 명군으로 오늘날에도 존경의 뜻을 모으고 있다.
사족이지만, 문화를 파괴한 나쁜 위정자는 역사의 심판으로 반드시 엄벌에 처해질 것이다.
NTD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