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ntdtv.com 2012-07-30]
베이징시 당국은, 이번 베이징 호우로 사망자수를 37명에서 77명으로 수정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당국의 발표를 무시하며 실제 사망자수는 천명 이상일 것으로 본다. 원자바오 총리는 재해나 사고 발생 직후 현장에 급히 출동, 구원활동을 지휘해 소방대장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상무위원들처럼 모습을 감추고, 재해에 대한 발언도 삼가하고 있다.
관계자 정보에 따르면 원자바오 총리는 베이징 호우로 사망자가 다수에 이른 책임을 거부하고 다른 상무위원과의 공동책임도 거부했다고 한다.
원자바오 총리는 2004년 7월 11일 베이징 호우 때 사태 수습차, 재해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구호활동을 지휘하고 피해자를 문병했다. 또한 북경시 정부는 “베이징시 건설 문제를 반성해야한다.”고 한 다음 “추가 강우에 대비하여 전기 공급, 교통 및 주택, 특히 위태로운 노후 주택의 안전성을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이번에는 다른 상무위원들처럼 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코멘트도 참았다. 호우 며칠 뒤인 7월 26일 “인민 일보”는 “국무원의 위탁에 의해 국무원 민정부 리리궈(李立?) 부장이 호우 피해에 관계있는 12개 성의 국무원 구원팀을 이끌고 베이징 팡산구 저우커우뎬(房山?周口店)과 청관진(城??)의 피해지에 가서 피해 상황을 조사했다.”고 보도했지만, 이런 제스처는 성난 시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 상징적인 것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같은 베이징시 호우 재해에 대한 원자바오 총리의 두 번의 대처가 이렇게 다르다. 그것은 왜일까?
베이징은 중공권력 구조에서 특별히 중요하며 중공정치의 중심이다. 베이징을 잡는 것은 종래 행정 국무원이 아니라 당의 실력파인 것이 통례다. 따라서 요소 베이징을 지배할 수 있으면 중국의 정치 중축을 손에 넣은 것이다. 수십 년간 베이징은 장쩌민의 심복인 저우융캉 (周永康)과 류치(劉淇)가 잡고 있었다.
따라서 베이징 호우로 심각한 재해 발생 후 높아지는 시민들의 원성에 대해 후진타오 국가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는 모두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다.
7월 4일 중공북경 대표대회에서 류치가 나이 제한으로 은퇴하자 후진타오 공청단 파의 중진인 궈진롱(郭金龍) 전 베이징 시장이 베이징시 서기로 취임할 전망이었다. 이번 호우 피해로 인민일보조차 그를 지명하여 비판하고, 시민들의 책임 추궁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궈징롱은 어쩔 수없이 시장을 사임했다. 즉, 예상치 못한 호우로 후진타오 세력은 장쩌민 세력의 실정 책임을 뒤집어쓰고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한편, 7월 28일 “인민 일보”와 “해방군보(解放軍報)”는 홈페이지에서 후진타오 주석의 업적을 찬양하고 군인들은 “후진타오 담화를 학습하면 할수록 격려된다.”라고 보도했다. 매스컴은 곧 개최되는 “北戴河 회의”(北戴河에서 피서를 이유로 지도부의 심각한 인사 결정 및 정책수립을 둘러싼 비밀회의)에서 군대와 국내 정세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후진타오 체제를 내외에 어필할 것으로 보인다.
베이징 호우로 중공의 각 파벌의 방향과 실력이 점차 밝혀졌다. 중공 붕괴 조짐도 더욱 밝아지고 그것에 대한 대응과 태도도 선명하게 분리 되었다. 즉, 원자바오 총리는 후진타오 주석과 마찬가지로 침묵을 유지하고 있지만, 둘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NTDTV Korea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