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 서열 하락, 관영 매스컴 보도(한,중,영)

[www.ntdtv.com 2013-01-24 04:56 AM]

장쩌민의 정적인 양바이빙(?白?) 송별행사에 대한 관영 매스컴 보도에는 장쩌민의 서열이 하락되어있습니다. 비록 매스컴에서는 장쩌민이 ‘18대’ 이후 서열을 ‘다른 옛 동지들과 같이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보도했지만, 평론가들은 장쩌민의 그 요구가 곧 3월에 국가주석에서 물러날 후진타오의 서열이 장쩌민의 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지 그런 말은 아닌지 궁금해 합니다. 이로써 장쩌민은 신임 총서기 시진핑에게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내어준 격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또 일부 사람들은 이는 장쩌민 세력이 차차 시위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6.4사건 당시 중공군위 비서장을 지냈던 양바이빙은 15일 별세했고, 1월 21일 중공 당국은 양바이빙 송별의식을 가졌습니다. 중공의 대변자 신화사는 고위층 화환 증정 명단에 현재 국가주석 후진타오 1위, 총서기 시진핑 2위, 우방궈, 원자바오, 자칭린과 기타 신입 상임위원들이 그 뒤를 따랐고 장쩌민의 이름은 7명 상임위원 뒤로 매겼는데 이 서열 순서는 세계 매스컴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1월 22일 중공의 대변매체 신화망은 18대 이후 장쩌민이 중공 중앙에 당과 국가 영도인의 의전 이름 서열에서 자신을 다른 노인들과 같이 배열하라고 했다고 밝혔습니다. 마치 양바이빙 고별식에서 나타난 서열이 이 보도를 실증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한 달 전 중공 전 전국정협 부주석 딩광쉰(丁光?)이 사망했을 때 관영 매스컴 보도에 장쩌민은 서열 제3위였고 후진타오와 시진핑 바로 뒤에 매겨졌습니다.

중공 18대 이전 장쩌민은 공식 공개활동에서 서열 순위를 항상 후진타오 바로 뒤로 했었는데 올해 3월 후진타오가 물러나면 장쩌민을 후진타오 앞에 매겨야 하는지 아니면 뒤에 매겨야 하는지요? 베이징 시 정치 연구가 화포(??)는 예전에 인터넷에 널리 퍼졌던 장쩌민의 요구가, 이번에 관영 매스컴에 다시 보도된 것에는 어떤 다른 원인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베이징 시 정치 연구가 화포]
“지금 번거로워졌습니다. 두 명의 태상황이 나타나서 앞에 놓아야 할지 뒤에 놓아야 하는지 하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는 이후에 중공의 뉴스 보도 순차문제에 반영 될 것이고 이는 그와 후진타오 중에 누가 높고 낮은지를 나타내게 됩니다.”

화포는 현재 장쩌민이 시진핑에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문제를 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홍콩의 시사평론가 청샹 역시 다른 민주국가에서는 한 지도자가 내려가고 그 후 그가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하면 지도자의 요청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중공과 같은 정황은 어느 나라에도 없는데 항상 노인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내기를 요구합니다. 이는 권력 인수인계 제도가 충분히 정립되어있지 못함을 반영하며 중공의 권력 교체가 아직도 노인 정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반영한다고 분석합니다.

[홍콩 시사평론원 청샹]
“장쩌민은 이미 물러난 관원으로서 정치무대에 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모습은 노인이 정치에 간섭한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자신이 서열에서 뒤로 매겨지길 원했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이런 순위가 없어야 하고 물러났으면 물러난 것이어야 합니다. 정치 무대에 얼굴을 내밀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바이빙의 원명은 양상정(??正)이고 전 국가주석 양상쿤의 동생이었습니다. 1987년 중공 ‘13대’ 이후 양상쿤, 양바이빙은 각각 중공 중앙군위의 상무 부주석 겸 비서장과 총 정치부 주임을 역임했으며 양가장(?家?)이라고 불렸습니다. 6.4 사건은 두 사람이 임직 하는 기간에 발생했습니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방 시찰 후 양바이빙은 ‘군대는 개혁개방을 위해 항해를 보호해야 한다.’고 하면서 장쩌민의 부재 중에 군위회의를 열었고 그 당시 군위 주석 장쩌민의 실권을 없애려고 했는데 역사적으로 ‘양바이빙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 후 양바이빙은 군에서 파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소문에 대해서 정부 측이 인정한 바는 없습니다.

[화포]
“물론, 양바이빙은 그 당시 장쩌민에게 깊은 원한이 있었는데, 이는 일목 요연한 상황입니다. 모두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장쩌민이 비록 출석하지 않았지만, 제 생각에는 첫째 원인이 신체적 원인이었던 것 같고 두 번째 원인은 여러분들도 아시다 시피 예전부터 정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장리판(章立凡)은 ‘독일의 목소리’에서 그 당시 장쩌민이 양씨 집안을 쳐냈고 현재 당국이 서열을 아래로 내리는 것은 받은 대로 갚아주는 격이라고 해석했습니다.

NTDTV 뉴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