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중공 전 통일전선부 부장이며 중앙판공청 주임이었던 링지화(令計劃)가 사법 당국에 넘겨졌지만, 사건의 내막은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한 언론은 링지화 관련 7대 미해결 정치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그중에서 링지화 아들의 교통사고가 우연인지, 아니면 정치적 모살(謀殺)인지, 링지화가 중앙판공청을 떠난 것이 시진핑의 은신과 관계가 있는지가 가장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함께 알아 보겠습니다.
[기자] 22일, 미국 따지웬(大紀元) 뉴스 홈페이지가 열거한 링지화 배후의 7대 미해결 정치 의혹 중에는 링지화가 어떻게 중앙판공청 주임이라는 높은 자리에 올랐는지, 페라리 교통사고가 정치 모살인지 우발적 사고인지, 신 4인방은 언제 결성됐는지, 링완청(令完成, 링지화의 동생)이 체포됐는지, 링완청이 무슨 국가기밀을 훔쳤는지, 링지화가 장쩌민파에 잠입한 것인지 아니면 후진타오(胡錦濤)를 배반한 것인지, 링지화가 중앙판공청을 떠난 것이 시진핑의 은신과 관계가 있는지 등이 포함됐습니다.
그중에서 링지화의 아들 링구(令谷)가 페라리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것이 도대체 우연한 사건인지 아니면 정치적 모살인지, 교통사고와 다음 날 베이징에서 들린 총성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또 권력을 인수하기 직전 시진핑의 은신은 링지화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가 특히 외부 세계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2012년 3월 15일, 보시라이(薄熙來)가 정직 처분을 받고 조사를 받은 후 잇달아 두 가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3월 18일, 링지화의 아들 링구가 운전하던 페라리 스포츠카가 교통사고를 내 링구가 현장에서 사망하고, 동승한 두 명의 여성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3월 19일에는 군용 차량이 베이징에 진입했고, 중난하이에서 총성이 들렸다는 소문이 인터넷으로 퍼졌습니다.
이 두 사건이 서로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당시 여러 가지 소문이 돌았는데요, 하나는 교통사고가 우연히 발생하자 링지화가 저우융캉 휘하의 중앙경위국에 부탁해 현장을 봉쇄하고 추문을 차단했고, 저우융캉(周永康)이 자기 심복 장제민(蔣潔敏)이 회장으로 있는 중국석유공사에 피해 여성의 가족에게 천만 위안의 거금을 지급하도록 지시해 입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소문은 저우융캉이 그 사고를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는데, 목적은 링지화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두 경우 모두 저우융캉과 링지화, 보시라이, 쉬차이허우(徐才厚) 등 4인방이 언제 결성됐는가 하는 문제로 관심이 연결됩니다.
시사평론가 천포쿵(陳破空)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하나는 저우융캉과 링지화가 원래 동맹을 맺은 상태였고, 저우융캉이 링지화를 도와 추문을 덮어 감췄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저우융캉이 사고를 계획해 실행에 옮겼고, 사고 후에 두 사람이 동맹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중국 차이신망(財新網)도 정황상 링지화와 저우융캉, 보시라이 등의 사이에 모종의 동맹관계가 결성됐다고 보도했습니다. 3월 18일 페라리 사고로 아들이 숨진 것을 감추기 위해 링지화는 당시 정법(政法) 계통 책임자와 모종의 정치적 거래를 했지만, 이 거래는 그 직후 곧바로 발각되었고, 링지화의 정치 노정은 그 때부터 역전됐다는 것입니다.
[천밍후이(陳明慧), 시사평론가] “모든 게 서로 간에 거미줄 같이 연결돼 있습니다. 개인 간에도 일부 소소한 거래에다 이익상, 안전상 또는 시험적으로 온갖 교환이 있고, 또 파벌 간에는 작은 이익 동맹이 있습니다.”
그럼 차이신망이 언급한 ‘거래 직후 발각’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혹 3월 19일 중난하이에서 들린 총소리가 그 발각과 관계가 있을까요? 당시 중공 언론 환구시보(環球時報)는 링지화 등이 심지어 정권을 전복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이라고 말해 정변을 암시했습니다.
[화포(華頗), 베이징 시정관찰가] “모반이라는 죄명을 대중 앞에 폭로하는 건 중공은 절대 감히 못합니다. 60여 년을 집권했는데 아직도 모반이라니, 사람들한테 중공체제의 정당성 문제까지 떠올리게 합니다. 과연 `3.19`총성 사건과 `3.18`페라리 사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페라리 자동차 사고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공교로운 것이 많습니다.”
이밖에 중공의 18대를 앞둔 2012년 9월 1일부터 14일까지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르기로 되어 있던 시진핑이 갑자기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그 이유에 대해 온갖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정부 측은 수영을 하다 등을 다쳤기 때문이라고 해명했지만, 당시 외부 세계의 의문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천포쿵은 당시 보시라이가 정직 처분을 받았지만, 더 이상의 처벌이 전혀 없었고, 소문에 의하면 저우융캉, 링지화, 쉬차이허우 등의 강력한 유세와 활동에 힘입어 보시라이 사건이 순조롭게 해결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시진핑은 고위층을 향해 주석직을 걸고 보시라이 처벌과 링지화 제거를 요구했습니다. 일관적으로 이미 정해진 각본에 따라 연기를 펼쳐온 중공 고위층은 보시라이 사건으로 강한 쇼크를 겪은 후, 확정된 지도자가 취임을 거부하는 강렬한 충격을 또 다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9월 1일, 시진핑이 은신에 들어간 동안에 중공 중앙은 중앙판공청 주임을 교체한다는 발표를 했고, 링지화는 자리를 떠났습니다.
링지화 사건 배후의 이런 의혹에 대해 중국 시사평론가 천밍후이는 이런 일들을 중공 내부에서는 모두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NTD 뉴스 류후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