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禁闻] 명문대 여대생 류즈메이, 누가 그녀를 살해했나? (상)

 

[www.ntdtv.co.kr   2015-03-01 04:20 PM]

 

[앵커] 
양의 해 전날, 중국 산둥(山東)성 라이양(萊陽)시에서 한 30대 여성이 머리에 상처를 입은 채 우물 속 변사체로 발견됐습니다. 경찰조사에서 이 여성은 중국 최고명문 칭화대 출신의 수재로 소문났던 류쯔메이(柳志梅)로 밝혀졌습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요? 사건의 참혹한 진상은 18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자]

류즈메이는 산둥성 라이양시 퇀왕(團旺)진 싼칭(三青)촌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류씨는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공부에 재능을 보이며 수재로 주변마을까지 소문이 났습니다. 1997년 17세의 류씨는 산둥성 지역 대입선발시험에 최고성적을 거둬 중국 최고명문 칭화대 화학계열에 입학했습니다. 류씨의 고향에서는 개천에서 용났다며 기뻐했습니다. 주변에선 류씨가 청순하고 선량하며 소박한데다 심성이 굳건해 고향이나 칭화대에서 환영받았다고 기억합니다.

 

[상친(尚勤,가명) 류씨의 친구]

“2000년쯤에 류즈메이를 알게 됐습니다. 그녀가 갓 스무살을 넘긴 때였는데, 산둥지역에서 공부를 잘해 칭화대에 추천 입학했다고 들었습니다. 아주 순박하고 성실한 친구로 기억합니다.”

 

[류원위(刘文宇), 전 칭화대 대학원생]

“내 기억으로 류즈메이는 아주 얌전하고 착하고 순박했습니다. 그 나이쯤 되면 약간 교활한 점이나 가식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녀는 그런 거 없이 시원시원했지요. 제멋대로 굴거나 남에게 함부로 말하는 경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90년대 말, 파룬궁이 중국대륙에 널리 확산되면서 칭화대에서도 교수와 학생 천여명이 파룬궁을 수련했습니다. 당시 칭화대에는 아침 수련장소가 최대 11곳까지 있었으며 류씨도 이 무렵 수련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수련 1년 여만인 1999년 7월,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 장쩌민과 추종세력이 파룬궁을 탄압을 시작하면서, 2학년 재학 중이던 류씨와 파룬궁을 수련하는 다른 칭화대생들에게도 전에 없던 재난이 들이닥쳤습니다.

 

[류원위]

“99년 10월, 칭화대에서는 공산당 중앙의 방침에 따라 대법제자(파룬궁 수련자)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련자에게 수련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도록 했어요. 수련을 지속한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모두 박해당했다. 정학이나 무기정학, 퇴학처분이 내려졌고, 감옥이나 노동교양소로 보내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미국에 서버를 둔 ‘명혜망(明慧网)’에 따르면, 당시 칭화대측이 파룬궁에 대한 신앙을 포기시키기 위해 학생들을 강제로 휴학·귀가시키면서 “진심으로 포기하지 않으면 돌아올 수 없다”고 했고, 이로인해 다수의 우수한 학생들이 여러 차례 휴학되거나 대학원 입학이 거부되고 학적이 말소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류원위]

“류즈메이는 칭화대 화공계열이었습니다. 화공과의 서기와 서무과장은 상급의 방침을 전적으로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해 11월말쯤, 당으로부터 은밀하게 통지받은 류즈메이의 부모가 학과사무실로 찾아와 류즈메이를 산둥 고향집으로 데려갔습니다. 강제휴학이라는 말뿐, 휴학에 대한 근거도 통지서도 없었습니다.”

 

귀향한 류씨는 부모와 친척, 친구, 이웃의 압력에 하루 종일 시달리는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학교에 돌아가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000년 5월, 류씨는 복학의 희망을 품고 칭화대로 돌아왔지만 실망만이 돌아왔습니다.

 

[류원위]

“학과측은 수련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야 한다는 기존입장을 고수했습니다. 류즈메이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며 각서쓰기를 거부했습니다. 복학이 되지 않아 상심한 류즈메이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학과 교직원은 무척 악랄한 태도로 파룬궁 수련이 무슨 죄인양 류즈메이를 몰아 세웠습니다.”

 

2001년 3월 칭화대는 결국 류씨의 학적을 말소해, 남은 희망마저 없애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기에 그녀는 죽음의 심연에 떨어지게 됩니다.

 

NTD뉴스 장텐위(张天宇)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