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쯔양 사망 9주년, 민중은 그를 그리워하다(한,중,영)

[www.ntdtv.co.kr 2014-01-08 07:20 AM]

앵커:
9년 전 1월 17일 중국 공산당 전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이 사망했습니다. 그의 생일이나 기일이 되면 아직도 그가 살았던 곳을 방문하는 시민이 끊이지 않습니다. 덩샤오핑과 장쩌민에 의해 15년간 연금됐던 전 총서기는 왜 지금까지도 시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까요? 연금 상태의 자오쯔양을 만난 적이 있는 ‘공산당 중앙농촌정책연구실’ 연구원 야오젠푸(姚監復)를 1월 7일 취재했습니다.

기자:
9년 전 1월 17일, 자오쯔양은 15년간 연금 끝에 85세의 나이로 조용히 사망했습니다. 실각 원인은 ‘6.4 천안문 대학살’ 당시 무력 진압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8년 동안 자오쯔양의 생일이나 기일이 되면 많은 시민이 그가 살던 베이징 왕푸징 부근 푸창후퉁 6번지를 방문해 그를 애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당국의 방해와 폭력이었습니다.

올해 82세인 ‘공산당 중앙농촌정책연구실’ 전직 연구원 야오젠푸는 당국의 검열을 통과해 만년의 자오쯔양을 만난 소수의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야오젠푸, 전직 공산당 중앙농촌정책연구실 연구원]
“시민들에게 사랑받는 것은 그가 진리를 견지했기 때문입니다. 당국의 압력이나 유혹에도 이겨냈습니다. 이러한 공산당 지도자는 보기 드뭅니다. 그는 모범이 되었습니다.”

‘6.4 천안문 학생 민주화운동’ 직전 상하이시 수장이었던 장쩌민이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주간지 ‘세계경제도보(世界経済導報)’를 폐간시키자 부패 반대 항의활동이 전국으로 퍼졌습니다. 공산당은 당시 일당 독재를 지키기 위해 정치 개혁뿐 아니라 학생과의 대화도 거부했습니다.

1989년 5월 19일 오전 4시 50분 학생들의 주장을 지지한 자오쯔양은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 투쟁 중인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자오쯔양, 공산당 전 총서기]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 자네들에게 비판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번에 온 것은 용서를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학생 여러분은 벌써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단식한 지도 벌써 7일째다. 계속해선 안 된다.”

그러나 6월 4일 천안문 광장, 장안도로와 주요 교차로에서 덩샤오핑의 명령을 받은 군대가 비무장인 학생과 시민을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덩샤오핑의 탄압 결정에 반대한 자오쯔양은 6월 하순 총서기에서 해임되고 연금됐습니다.

[야오젠푸, 전직 공산당 중앙농촌정책연구실 연구원]
“자오쯔양은 인도적 범죄에 반대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덩샤오핑이 자행한 것은 역사와 중국인과 인류에 대한 범죄입니다. 반 인류 범죄에는 시효가 없습니다. 장래에 반드시 재판을 받을 것입니다. 도덕의 법정, 역사의 법정, 그리고 국제법정에서…”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하고 자오쯔양은 두 차례 편지를 통해 천안문 사건의 재평가와 연금 해제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최고 지도자는 ‘세계경제도보’를 폐간한 공로로 발탁된 장쩌민이었습니다.

장쩌민은 자오쯔양이 집에서조차 지인과의 만남을 금지하고, 농민이 경영하는 교외의 골프장과 병원에 가는 것 외에는 외출을 금지했습니다. 장쩌민은 2002년 퇴임 시 차기 지도자들에게 ‘6.4항쟁’에 대한 재평가를 금지했습니다. 그 결과 자오쯔양은 죽을 때까지 연금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6.4항쟁’에 참가한 중국 인권변호사 푸(浦)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푸즈창(浦志強) 씨, 인권변호사]
“저 역시 자오쯔양에게 감동하였습니다. 적어도 그때 그는 성실했습니다. 다른 공산당 총서기와는 다릅니다. 6.4항쟁을 통해 그는 자신의 이념을 관철했습니다. 그 때문에 여생을 연금상태로 보냈습니다. 공산당 통치하에서 정의는 비극적인 운명에 처해 진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2005년 초 자오쯔양이 사망하자 그의 딸은 “아버지는 마침내 자유롭게 되었다”고 탄식했습니다.

NTD TV 탕인(唐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