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ntdtv.co.kr2013-07-29 02:54 AM]
앵커:
한국전쟁 정전 60주년 기념일을 맞아 리위안차오(李源潮) 중국 국가 부주석이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중공)은 당초 한국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으로 선전했지만 진실한 내막은 따로 있습니다.
이번에 ‘위안차오(援朝)’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중국 부주석이 북핵 위협으로 양국 관계가 냉각된 가운데 북한을 방문했는데, 국제사회를 실망시키지 않으면서도 관계 개선에 성공할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기자:
중국 관영 언론에 따르면, 25일 저녁 김정은 북한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평양 백화원 영빈관에서 리위안차오 부주석을 맞이했습니다. 리 부주석은 이른바 ‘조선전쟁 정전6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우판(伍凡) 재미정치평론가]
“리 부주석이 북한을 방문한 목적은 뭘까요? 중공이 김정은에 대한 태도 및 대북 정책을 수정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수정은 불가피합니다. 수정하지 않으면 중공은 유엔에서 할 말이 없고 미국과의 관계도 영향을 받게 됩니다.”
리 부주석은 김정은과 회담에서,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와 6자회담 재개를 주장한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재미 정치평론가 우판은 김정은이 리 부주석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김정은이 핵무기로 국제사회를 위협하고 있는데, 핵무기가 없으면 리비아 독재자와 같은 처지가 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또 김정은은 무기거래로 돈벌이도 하고 있습니다.
한편, 올 들어 중국 관영 언론들이 ‘항미원조’ 대신 ‘조선전쟁’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우판(伍凡) 재미정치평론가]
“그렇게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지금 와서 보면 늑대를 키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중공은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고 있는데 그럴 용기가 없습니다. 중공 정권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해도 결국 그들에게 버림을 받습니다. 반면 미국을 보면, 전사자들은 유골이라도 반드시 찾아와 다시 묻어주고 유족들에게도 평생 보상을 해줍니다.”
1950년 출생인 리 부주석의 본명은 북한을 지원한다는 의미의 ‘위안차오(援朝)’였습니다. 역사학자 출신인 류인취안(劉因全)은 이른바 ‘항미원조’ 전쟁은 거짓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당시 3대 독재자 스탈린,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한국을 공산 국가로 만들려고 2차 세계대전 종식 당시 그어놓은 38선을 넘어 예고 없이 한국을 침략했습니다.
[류인취안 중국역사학자]
“이런 거짓말은 첫째 중국에 재난을 조성했고 둘째, 북한에 재난을 조성했으며 국제 사회에도 재난을 조성했습니다. 역사학자로서 저는 이런 거짓말은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과 북한 주민들을 속이는 이런 거짓말은 반드시 밝혀져야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까지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였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북한은 소련군 통제에 있다가 김일성에게 넘어갔고, 미국이 통제한 한국에서는 민주 선거가 실시됐습니다. 38선은 당시 양국의 국경선이 됐습니다.
한국전쟁은 북한군이 1950년 이 38선을 넘어 한국에 대한 기습 침공을 도발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뒤이어 서울이 함락됐고 한국군과 미 주둔군은 부산에서 포위됐습니다.
1950년 7월 7일, 유엔 안정보장이사회는 유엔군을 한국에 파병하기로 결의문을 채택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9월 15일, 유엔군은 전세를 뒤집어 북한군을 북쪽으로 밀어냈습니다.
이렇게 되자 10월 1일, 북한 지도자 김일성은 중공 지도자 마오쩌둥에게 서한을 보내 지원군을 요청했습니다. 같은 날 소련 지도자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전문을 보내 중국군을 ‘지원군신분’으로 북한에 파병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미국의 선전포고에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중공은 미국에 정식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300만명의 정규군을 민간 지원자들로 둔갑시켜 한국전쟁에 참전시켰습니다. 하지만 1951년 2월 1일, 유엔은 중공의 북한 지원을 ‘침략행위’로 규정했습니다.
중국군의 내부 전쟁기록에는 ‘항미원조 전쟁’에서 총 97만 8,122명의 병력이 감소했고, 사상자가 95만 2,501명에 이른다고 적혀 있습니다.
[류인취안 중국역사학자]
“사상자가 90만명을 초과했다고 하는데 이 숫자가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한 친척이 당시 북한 지원군이었는데 영(營) 지도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차례 교전에서 영 군인들이 전부 사망하고 그만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중공은 한국전쟁의 사망자는 38만명, 부상자는 18만명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