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ntdtv.com 2013-03-14 07:18 AM]
1982년 3월 13일, 중국공산당 당국은 한 자녀 정책을 기본으로하는 ‘계획 생육’ 정책을 국책으로 정하고 30년 후에는 인구정책을 바꿀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 정책을 제정한 지 이미 30년 이상 지났습니다.
폐막한 지 얼마 안 된 전인대에서 ‘대(大) 부서제 개혁안’이 나와 위생부와 계획 생육위원회가 합병된 ‘국가 위생 계획 생육위원회’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한 자녀 정책이 완화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외부의 기대에 대해 당국은 ‘계획 생육은 기본 국책이며, 강화할 수 있어도 완화할 수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한 자녀 정책 실행 후 31년, 태어나기도 전에 목숨이 끊어진 태아의 수는 4억 명에 달합니다.
이 다큐멘터리는 태아가 모체에서 성장하는 과정과 인위적으로 생명이 끊기는 끔찍한 과정을 기록하여 수상의 영예를 안은 작품입니다. 영화는 생명의 존엄과 낙태 중지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다른 대안을 세우지 않아, 중국의 어머니들 마음은 더욱 아프기만 할 뿐입니다.
계획 생육 정책은 중공 당국의 기본 국책이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49년부터 약 10년을 주기로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쳤습니다.
1950년대 초 중공의 계획 생육 정책은 엄격한 낙태 금지였습니다. 국공 내전 종료 직후 중공이 한국 전쟁에 참전할 때 마오쩌둥은 무기 장비 부족을 인해전술로 보충했습니다.
1950년과 52년, 당국은 임시 법률을 두 번이나 제정하고 “질병이 없는 한 낙태를 해서는 안 된다. 마음대로 피임 수술과 낙태 수술을 한 사람은 불법 낙태죄로 처벌한다.”고 규정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 중반이 되면서, 당국은 생육정책을 다소 이완, “당사자가 원한다면 낙태 수술해도 좋다.” 라고 했습니다. 이는 낙태에 반대하는 의학계의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1950년대 후반이 되면서 당국의 태도는 다시 출산 장려 쪽으로 바뀌게 됩니다.
옛 소련의 흐루시초프 공산당 서기의 회고록을 보면, 1955년 마오쩌둥은 흐루시초프에게 3 차 세계 대전을 발동해 미국을 소멸하자고 부추겼다고 합니다. 마오쩌둥은 먼저 미군을 중국 내륙으로 유인하여 소련이 중국에 원자폭탄을 발사해 미군의 주력 부대를 섬멸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중국도 4억 명의 희생자가 나올 것이지만, 몇 년 후에는 즉시 회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고 합니다.
전 국민의 희생도 마다치 않는 음모와 함께 1958년 4월, 막 시작한?? 대 약진 운동의 광기 어린 열기를 북돋우기 위해서, 마오쩌둥은 ‘사람이 많을수록 힘이 강하다.’는 글을 써서 공개적으로 출산을 옹호하고, 인구가 많으면 사회주의 기적을 실현하는데 유리할 것이라고 선전 격려했습니다.
이상에서 1950년대 중국공산당 당국의 생육 정책은 ‘업치락 뒤치락’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책이 또 변합니다.
60 년대 중국은 정치 운동의 음영에 덮여 광기로 가득 찬 10년이었습니다. 대약진 운동의 꿈은 거꾸로 3년간의 지옥 같은 대기근의 인재(人災)를 초래하여, 정 반대로 전 국민의 악몽이 되었습니다. 대약진 운동이 끝나고 5년 후, 더 참혹한 문화대혁명 폭풍이 시작되었습니다.
국가 전체 경제가 심각한 혼란 상태에 빠져, 식량 생산량은 눈에 띄게 감소했습니다. 당시, 최선의 해결 방법을 선택한다면, 국민의 경제력을 기르는 것으로, 출산을 격려해 인구를 늘리는 동시에 인민공사 제도를 개혁하고, 농민에게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어 농업 생산의 적극성을 촉진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기근 또는 문화대혁명 등으로 초래한 경제적 재난을 공산당 상층부는 인구 증가가 너무 빠른 탓이라고 했습니다. 이 곤경 타파를 위해서 계획 생육은 한 자녀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였습니다.
1970년대, 각지에서 문화대혁명 폭풍우가 불어 험악해지고 있을 때, 당국은 한 자녀 정책을 위한 분위기 조성을 시작했습니다. 이 정책은 10년간 서서히 강화되어 나중에는 반드시 실행해야하는 국가의 의지가 되었습니다.
80년대부터 강제로 실행하기 시작한 한 자녀 정책은 1982년 중공의 기본 국책이 되었습니다. 이후 1년간 만 1,400만여 명의 태아가 강제 낙태되었습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당국이 발표한 데이터만 봐도, 강제낙태 수는 매년 적어도 600만 건 이상에 달했습니다.
중국공산당 역사에서, 계획 생육은 피와 눈물로 얼룩진 역사입니다. 전란 시기 정부는 인구 증가를 격려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늘면 전선에서 희생되어주는 사람이 한 명 증가 때문입니다. 전후 평화시기가 되면, 정부는 바뀌어 인구 감소를 요구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줄면, 정치 실적의 발목을 잡는 짐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강제로 한 자녀 정책을 실행하는 나라입니다. 작은 생명에게서 생존권조차 앗아가는 것이 과연 중국의 발전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열쇠였을까요.
31년 간 강제 낙태로 사라진 4억의 생명. 중국공산당의 피로 물든 역사들 중의 하나 입니다.
NTD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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