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마오쩌둥 보시라이와 결합은 막았지만(한)

[www.ntdtv.com 2012-10-22] 최근 중국을 휩쓸었던 반일시위가 황금연휴를 맞으면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하지만 시위대에 마오쩌둥(毛澤東) 초상화가 등장해 긴 여운을 남겼다. 왜 마오쩌둥인가? 인터넷에 올라온 인터뷰 동영상에서 좌파 사이트 오유지향(烏有之鄕)의 운영자 판징강(范景剛)은 이렇게 말했다.

“마오쩌둥은 민족해방을 이끌었고 위대한 항일영웅이다. 마오쩌둥은 현재 당심, 군심, 민심을 단결시키는 유일한 정치적 상징물이다. 반일 시위대는 마오쩌둥의 강경한 외교적 자세를 그리워하고 있다.”

이 같은 인식은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를 잘못한 것이다. 중화민족은 지난 세기 중반에 해방을 맞았지만 마오쩌둥 중심의 공산당 업적은 아니었다. 2차 대전 일본 침략 당시 국민당이 항일전쟁에서 책임과 희생을 감당했다.

2005년 항일전쟁승리 60주년 기념 연설에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국민당 정부 공로를 시인했다. 후 주석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부대가 정면 전쟁과 적후 전쟁을 각각 분담했다.”고 말했다.

마오쩌둥의 외교정책을 강경하다고 평가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당내 투쟁에서든 대외 정책에서든 마오쩌둥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1949년 정권탈취 초기, 공산당은 구소련을 지지하면서 영토문제를 포함한 많은 문제에서 무조건 양보를 택했다.

대만에서 출간된 ‘중화민국지도’에서 보면 광활한 몽고 국토는 중국영토로 표기돼 있다. 이에 비해 댜오위다오(釣漁島. 일본명 센카쿠)의 면적은 보잘 것 없이 작다. 중국공산당은 자신을 항일전쟁의 주역으로 선전했지만 마오쩌둥은 일본침략에 감사하는 발언까지 했다.

1961년 마오쩌둥은 중국을 방문한 일본 대표단에 “일본 군벌이 중국 절반 지역을 점령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인민은 각성하여 단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산에서 지냈을 것이고 베이징에 경극 보러 오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오쩌둥의 이 발언은 중국외교부와 중앙문헌이 공동으로 편찬한 ‘마오쩌둥 외교문선’에 수록돼 있다.

반일시위대의 마오쩌둥 추앙에 과민 반응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혁명이나 대중운동에서 정치적 구호가 반드시 정확해야 한다는 법은 없으며 흑백이 전도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다.

그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들은 정말 일본을 위협하려는 것일까? 이는 보시라이(薄熙來)가 충칭에서 홍색캠페인을 벌였던 경우와 유사하다. 보시라이는 마오쩌둥 시대의 문화를 부활시켰지만 마오쩌둥을 진심으로 숭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일시위대와 보시라이는 사실 마오쩌둥이라는 정치적 상징물이 갖고 있는 합법성과 안정성을 노렸다. 문화대혁명 이후 모든 중공지도자들은 마오쩌둥의 정치적 유산을 조심스럽고 단호하게 봉쇄했다. 마오쩌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누구의 손도 닿지 못하도록 높은 곳에 올려놨다. 현 정권의 틀을 유지하면서 밖에서 정치적 힘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마오쩌둥은 금광이었다. 중국의 반쪽짜리 개혁은 각종 부작용을 낳았으며 마오쩌둥 추종자들에게 생존 공간을 마련해 줬다.

마오쩌둥의 권력을 물려받은 화궈펑(華國鋒)이 최고지도부에서 배척된 후, 공산당 내부에서 마오쩌둥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변두리로 밀려났다. 기껏해야 이데올로기영역에서 공세를 펼치는 정도였고 개혁개방 이후에는 설자리가 없었다. 덩샤오핑 시대에도 개혁파와 대립했던 천윈(陳雲) 세력은 계획파로 불렸을 뿐 마오쩌둥파로 불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오쩌둥 봉쇄의 진정한 도전은 보시라이(薄熙來)였다. 마오쩌둥의 이데올로기가 또 다시 정치세력과 결합돼 베이징 정권을 압박한 것이다. 이는 지난 30여 년 동안 있어본 적 없는 현상이었다. 원자바오 총리가 보시라이에 대한 처벌을 결정한 지난 3월 양회(兩會) 직후 문화대혁명의 재현을 경고하고 나선 이유도 이 때문이다.

보시라이는 사법처리를 앞두고 있다. 보시라이 처벌은 마오쩌둥 추종자들의 실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일시위에서 마오쩌둥의 이데올로기는 대중운동 민족주의와 신속하게 결합했다. 이는 위험한 현상이다. 베이징 당국이 3가지 모두 다루기 어려운 문제다. 시위대는 서슬 퍼런 양날의 검일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모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도광양회(韜光養晦)를 반대했다. ?

베이징 당국은 특단의 조치로 보시라이와 마오쩌둥을 격리시킬 수 있지만 대중운동-민족주의-마오쩌둥이 결합되는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외교전략을 위해 조심스럽게 대중시위를 이용했지만 대중시위에 마오쩌둥이 등장하는 것은 절대 원하지 않는다. 물론 판징강이 말한 것처럼 마오쩌둥이 현재 당심, 군심, 민심을 단결시키는 유일한 정치적 힘이 되고 있다는 주장이 현실이 되는 것은 더욱 원하지 않을 것이다.

뉴욕타임스 중문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