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ntdtv.com2012-10-01 09:54 AM]
보시라이(薄熙?)의 당적 박탈과 공직 추방 후 중공 상층부의 움직임이 활발해졌습니다.
전에 언급했듯이, 중공 18대는 9대를 흉내 내고 있습니다. 1969년 중공 9대 직전 파벌 간의 투쟁이 치열했지만, 진바오다오(珍?島) 위기 이후 두 파벌이 신속하게 통합하고 류샤오치(劉少奇)를 버렸습니다. 지금 18대도 대략 같은 상황에서 댜오위다오 문제로 서민의 불만을 돌리고, 정변을 노리고 있던 보시라이를 버리기 위해, 당내의 표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때 누군가가 보시라이를 지지하면, 보시라이 잔당으로 처리 되겠지요.
보시라이 처분 결정 후 중공은 국무원내 보시라이세력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노룽웨이보(老榕微博)에 따르면, “각부위원회는 중앙 소식을 통보하면서 전원 태도표명을 요구했다.” “보시라이와 관련이 있는 사람은 15일까지 자수하지 않으면 청산을 불사하겠다.”는 당의 입장이었습니다. 베이징에서 보시라이 잔당 처리는 3월부터 시작됐고 군대에 태도표명을 요구했습니다. 3월 12일, 후진타오는 중공이 군대를 지휘하는 정책을 견지할 것을 요구했고, ‘해방군보(解放軍報)’는 3월 19일 ‘당이 총을 지휘한다.’는 평론문을 제 일면에 게재. 5월 ‘해방군보’는 재차 중공이 이끌어 나갈 것을 요구하는 평론문을 게재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각 군구에서 후진타오 지지 ??태도표명이 이루어졌습니다. 미디어의 분석에 따르면, 이것은 중공 내부에 후진타오를 따르지 않는 야심가가 나온 것을 반증합니다.
그러나 보시라이 잔당 처리는 5월에 멈추었습니다. 현재 나온 정보에 따르면, 당시 중공 상무위원회 내부에서는 저우융캉이 실권을 내려놓고 18대 인사 추천권을 포기하면, 보시라이잔당은 추궁하지 않는다는 협의를 체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5월 이후 저우융캉과 쩡칭홍은 보시라이를 구하려는 작업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시진핑이 보름 정도 몸을 숨긴 것은 장쩌민파가 시진핑에게 보시라이 형사처분 면제를 강요했기 때문에 시진핑은 권력교체를 거부, 보름동안 몸을 숨겼으므로 상층부가 보시라이의 엄중 처분에 동의했다고 합니다. 이 정보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진핑이 모습을 드러낸 때 왕리쥔 공판이 진행되었으며 신화사 보도에서도 화살을 ‘충칭 주요 책임자 보시라이’를 향했습니다. 당황한 저우융캉은 스스로 안휘성 합비 법원에 가서 처벌에 반대하는 언론을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다시 중공 내부 보시라이 잔당을 눈감아주자는 협의는 중단되고 전원 태도표명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보시라이 처분 후 다음날 왕양이 주최한 광둥 상무위원회에서 당 중앙의 보시라이 심사 처분에 대해 단호하게 옹호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충칭 장더장(長?江)이었습니다. 보시라이와의 관계에 선을 긋고 싶다면 18대 보고서를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동작이 느리면 정치국 진입은 불가능합니다.
NTD 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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