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18대 전야 빈번한 군의 움직임(한,중,일)

[www.ntdtv.com 2012-09-22 08:18 AM]

중공 관영 언론은 9월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를 이용해 애국정서를 선동하고 군부도 강경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댜오위다오는 중공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중국의 역사학자 레이이(雷?)가 웨이보에 비밀을 누설했습니다.

중국과 일본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중국 역사학자 레이이(雷?)는 웨이보에 ‘1969년 9대 개최 전, 문화혁명 파벌투쟁은 매우 심각했습니다. 많은 지방에서 두 파벌이 무력투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9대 개최가 불투명했습니다.’는 글을 올려 댜오위다오가 중공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1969년 3월, 전바오다오(珍?島)에서는 중국과 구소련 사이에 소규모 무장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마오쩌둥은 전쟁을 이유로 신속히 파벌조직을 취소하고 4월에 개최 예정인 9대를 위해 조건을 마련했습니다.

레이이의 글은 인터넷에서 비정상으로 보일 만큼 인기를 끌었습니다. 다른 네티즌도 당시의 사건과 관련해 ‘1969년 3월, ‘타도소련’ 시위에 참가하고 한 달 후에는 중공 제9대 원만한 개최를 축하하는 퍼레이드에 참가했다’고 올렸습니다.

레이이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댜오위다오는 1969년의 ‘전바오다오’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중공이 국민들의 시선을 18대에서 다른 곳으로 돌려 단결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후 레이이의 웨이보는 삭제됐습니다.

댜오위다오 위기 발발 후 중공 군부는 대규모 움직임을 보이고 실제로 1969년 상황과 유사합니다. 9월 난징, 광저우, 청두, 지난 4대 군구(軍?)에서 실전훈련을 했습니다. 네티즌들도 장갑차, 전차 혹은 자주포 등이 거리와 기차역에 대량 출현한 것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마오쩌둥은 ‘9대’에서 소련을 외부의 적으로 만들어놓고 내부의 적 류샤오치(劉少奇)를 일부러 남겨두었습니다. 18대 개최 전, 왕리쥔의 미국 영사관 진입 사건은 보시라이와 저우융캉의 시진핑 배제 음모를 들춰냈습니다. 신화사는 이번 내부의 적은 말할 필요도 없이 보시라이라고 설명하고, 지난 19일, 왕리쥔 사건에 대한 자세한 경위를 보도하며 충칭시 서기였던 보시라이에게 화살을 돌렸습니다. 보시라이가 형법에 따른 처벌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NTD 뉴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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