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国最神秘三座墓 一找不到一挖不动一不敢挖
중국 역사가 남겨놓은 세 개의 신비한 무덤 중, 하나는 사람들이 찾아내지 못했고, 하나는 파낼 수 없고, 하나는 감히 파지 못한다. 이 세 개 무덤은 어디에 있는 누구의 것일까? 도굴이란 직업은 역사가 오래고 역대의 무덤에는 도굴을 막기 위한 각종 방법과 장치가 동원되었다. 하지만 무덤은 결코 사망자를 편안히 쉬게 해주지 못했다. 중국의 “무덤 열 개에서 아홉은 텅 비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무덤은 도굴되지 않았는데 유형은 세 가지다. 아예 찾을 수 없는 무덤, 찾았지만 파고들어갈 수 없는 무덤, 또는 찾았지만 감히 파고들어가지 못하는 무덤이다. 오늘 여러분에게 소개할 무덤은 위의 세 가지 조건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들이다.
칭기즈 칸 능묘는 찾을 수 없다
한 시대의 위대한 군주였던 칭기즈 칸의 능묘에 대해 세인은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의 능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어떤 사람은 그의 무덤은 네이멍구 오르도스(ordos)의 어퉈커(鄂托克) 기(旗)에 있다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닝샤(宁夏)성 류판(六盘) 산에 있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신장성 북부 아러타이(阿勒泰) 산에 있다고 하는데, 아무튼 칭기즈 칸 무덤의 위치는 아직도 수수께끼다. 일설에 의하면, 칭기즈 칸이 자기가 죽은 후 묻힌 곳을 세인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기에 신하들은 그를 비밀리에 묻었다고 한다. 마르코 폴로의 설에 따르면, 칭기즈 칸의 영구를 운반한 사람들은 모두 살해당했고 묘는 지하에 깊이 묻었으며, 말 일만 마리로 그 위를 휩쓸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칭기즈 칸은 죽기 전에 자기 무덤의 위치를 세인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인터넷사진)
진시황의 진묘(秦墓)는 감히 파지 못 한다.
진시황릉을 발견한지는 이미 40여 년이 됐지만 발굴은 오늘까지도 완전하지 않다.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 현대 기술로도 무덤을 손상 없이 파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풍문인 바, 진시황릉에는 기관이 수없이 많고 또 대량의 수은이 있다고 한다. 때문에 무턱대고 파고들다가는 들어는 가도 나오지는 못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가 있다. 세 번째 이유는 바로 파낸 것을 보호하는 문제인데 지하에서 천년 동안 거의 진공 환경에 있던 것을 갑자기 공기에 노출시킨다면 손상이 매우 클 수가 있다. 문물을 더욱 잘 보호하기 위해서는 아직 진시황 무덤을 파서는 안 된다.
진시황 무덤에는 기관이 겹겹이 설치되어 감히 파내지 못한다(인터넷사진)
측천무후의 간릉(干陵)은 팔 수 없다.
측천무후의 무덤은 산시성 간현 량산(干县 梁山)에 있다. 일설에 따르면 안에는 보물이 수없이 많다고 해서 수많은 도굴꾼이 찾아들었다고 한다. 정사 기록에 따르면, 무덤은 17번이나 도굴 당했다 하고, 기타 기록되지 않은 것은 더욱 많아 세려야 셀 수도 없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도굴은 세 번 있었다.
첫 번째는 당나라 말기의 반란군 수장 황차오(黄巢)의 도굴 시도였다. 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황차오는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간릉을 팠다. 그는 량산의 절반을 평지로 만들었지만 출입구마저도 찾지 못했다.
두 번째는 오대(五代 : 당나라와 송나라사이의 시기) 후량(後梁)의 절도사 원타오(温韬)의 도굴이었다. “당나라 18능” 도굴을 목표로 세우고 그도 간릉을 도굴하려 했으나 준비 과정에서 괴이한 날씨가 자꾸 나타나 병사들이 겁에 질려 뿔뿔이 도망갔다.
세 번째는 중화민국 시절 군벌 쑨롄중(孙连仲)이 군사훈련을 위장해 대군을 거느리고 무덤으로 가는 길 양쪽의 3층으로 된 암석층을 폭파시키며 무덤 입구를 찾았지만, 막 무덤에 진입하려 할 때 병사 7명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면서 죽었다. 이 괴사로 도굴은 실패했다.
측천무후의 무덤은 산시성 간현 량산에 있다(인터넷사진)
참고 기사 칸중궈(看中国)
책임편집 : 임호(任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