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사무실 설립 17년,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 이유

610办公室成立17年 江泽民为何迫害法轮功

 

17년 전 6월 10일, 당시 중공 총서기 장쩌민은 파룬궁을 박해하기 위해 불법기구 하나를 설립했습니다. 이 기관은 명칭이 ‘610’사무실이고 전국각지에서 파룬궁 박해를 강화시켰습니다.

 

1999년 6월 7일, 중공 당수 장쩌민은 리란칭(李岚清)을 책임자로 뤄간(罗干)과 딩관건(丁关根)을 보조로 하는 중공중앙 파룬궁문제처리 영도소조를 설립한다고 중앙정치국에 선언했습니다. 3일후 이 소조를 정식으로 설립하면서 산하에 사무실 하나를 열었는데, 이것이 ‘610’사무실입니다.

 

‘610’의 역할 규정은 전국에서 파룬궁 박해에 대해 협조하고 지휘하는 것이었습니다.

 

[헝허(横河), 중국문제 전문가]

“이 조직을 만든 것은 사실 파룬궁 박해가 법치에 맞지 않음을 드러냈습니다. 만약 법치를 하려 한다면, 법 위반자를 법률로 처리하면 되는데, 무엇하러 중공중앙에 조직을 하나 더 세울까요? 다시 말하면 그것은 당 지도자의 정치운동입니다.”

 

1989년 당시 실권자였던 군사위 주석 덩샤오핑은 장쩌민이 그해의 6.4탄압을 지지했다는 점을 높이 사 장쩌민을 중공 총서기로 발탁했습니다. 그러나 1992년, 덩샤오핑은 장쩌민의 후임자로 후진타오를 미리 지정했습니다.

 

[저우청캉(周成康), 양안(两岸) 시정평론가]

“장쩌민은 후진타오의 권력을 빼앗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장쩌민의 지위는 덩샤오핑에게 크게 뒤지기 때문에 감히 (고) 덩샤오핑(의 영향력)을 거스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국공산당의 문화를 이용해 수를 냈습니다. 바로 대규모 정치 운동을 일으키는 것이었죠. 정치투쟁이 벌어지면 대부분의 법과 제도는 마비되며, 정치운동 지도자 개인의 노선이 전체를 주도합니다. 이 방식으로 그는 당과 국가 제도를 초월하고 최고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1992년, 파룬궁이 중국에서 전파되었습니다. 국가체육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파룬궁을 수련했을 때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하는 비율은 97.9%에 달했습니다.

 

그밖에, 파룬궁은 도덕 수련을 강조하기에, 수련인들은 성금을 기부하고, 사람을 구하고, 길을 닦는 등 여러 가지 선행으로 계속 중국 언론을 장식했습니다. 1998년 공안부 내부통계에 따르면 중국 내 파룬궁 수련인 수는 7천만~1억 명이었습니다.

 

[저우청캉(周成康)]

“타이완이라면, 사회에 좋은 사람이 많은 것을 두려워할까요? 하지만 공산당은 ‘군중투쟁’으로 일어선 정당인만큼 공산당 문화아래에서는 바로 ‘군중’이 모이면 권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탄압 대상이 됩니다.”

 

해외 언론에 따르면, 1999년 장쩌민이 파룬궁 탄압을 제안할 때 장쩌민을 포함한 정치국 상무위원 7명중 6명이 반대했습니다.

 

[원자오(文昭)]

“그들(정치국 상무위원)은 최후에는 자신의 의견을 바꾸었습니다. 이는 중공의 ‘당성(党性)’ 때문인데, 특히 장쩌민이 망당망국(亡党亡国)론을 주장하면서 (공산주의) 정치원칙을 강하게 제기하자 그들은 당성에 공공연히 저항하면 안 된다고 느낀 것입니다.”

 

[헝허(横河)]

“중공이 ‘무신론’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종교신앙은 당의 적이 됩니다. 당은 어떤 종교신앙과도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1999년 박해가 시작된 후 장쩌민을 따라 박해정책을 집행한 저우융캉, 리둥성, 장웨(张越) 등 많은 관리들은 빠른 속도로 승진하면서 610사무실의 각급 직책을 가져갔습니다.

 

하지만 17년 후의 오늘, 610계통의 처지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뉴욕에서 NTD 뉴스 린란(林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