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페이] 시진핑의 새 직함 – 군위연지총지휘

【微视频】习近平新头衔暗示夺得指挥权

 

[자오페이]

4월 20일, 시진핑은 군사위원회 연합작전 지휘센터로 갔습니다. 그리고 시진핑은 새로운 직함인 군위연지(军委联指)총지휘라는 직함을 얻었습니다. 이 직함은 길게 말하면, ‘군사위원회 연합작전 지휘센터 총지휘’로서 군대의 총지휘권과 총사령권을 시진핑이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쩌민시대부터 시작하여 군위주석은 군위부주석에게 배척당하여 실권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원래 군위주석은 총서기입니다. ‘당이 총을 지휘’하는 중공의 규정에 따르면 총서기가 군위부주석 이하 군 전체를 지휘해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2002년 은퇴한 중공 총서기 장쩌민은 규정에 따라 군위주석을 사직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11월 13일 당시 16대 주석단 상무위원 제4차 회의에서 주석단 군부 위원 20명과 군위부주석 장완녠(张万年)은 ‘특별 동의안’을 제출하여 장쩌민의 군위주석 연임을 요구했습니다. 후진타오는 어쩔 수 없이 찬성했고, 후일 장완녠의 이 행위는 ‘군사반란’, 혹은 후진타오의 군위주석직 ‘퇴위강요’로 해석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장쩌민은 두 명의 군위 부주석을 임명하고 후진타오의 실권을 빼았습니다. 이렇게 생긴 모순은 2008년 원촨 대지진 때 마침내 폭발했습니다. 신화사 기자는 블로그에서 원자바오 총리가 두 번이나 군에 대해 화를 냈다고 밝혔습니다. 5월 13일, 펑저우(彭州)시의 10만 민중이 산속에 갇혀 생사기로에 처했는데도 중공군은 날씨가 좋지 않고 산사태가 있다는 등 핑계로 구호물자 운송을 거부했습니다. 원자바오는 전화기에 대고 큰소리로 “나는 당신들이 어떠하던지 상관한해요. 나는 다만 이 10만 군중이 위험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라고 말을 마친 후 전화기를 팽개쳤습니다.

 

다음 날인 5월 14일, 재해 지역에 낙하산 부대를 공중 투하하려는 계획이 또 다시 지연되자 원자바오는 낙하산 부대 지휘관에게 “한마디 합시다. 국민들이 당신들을 키우고 있으니 당신들은 알아서 처리하셔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군위 부주석 궈보슝은 재해지역에 지진대책 지휘부를 설립하고 ‘총지휘’를 자처하며 원자바오의 지휘권을 묵살했습니다. 궈보슝의 이런 태도 때문에 후진타오는 직접 청두(成都)에 달려가서 원자바오를 적극 도와야 했습니다. 이런 군대 지휘권 쟁탈의 알력은 궈보슝의 배후 조종자 장쩌민이 군 지휘권에 미련이 많았음을 보여줍니다.

 

시진핑의 새 직함–군위연지 총지휘는 그가 총지휘센터를 통해 직접 5개 전역 지휘센터에 명령을 내릴 수 있음을 뜻합니다. 군 전체에 대한 지휘 사령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군사위 주석을 대신하여 지휘하던 군사위 부주석의 권력은 사라진 것입니다. 총서기를 군으로 견제해 보려던 장쩌민의 노력은 이제 깨끗이 정리된 셈입니다.

 

해외의 어떤 사람은 중국이 즉시 민주를 실행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나는 좀 여유를 두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민국 8년에 후스(胡适, 중국의 문학자ㆍ사상가)선생은 “문제를 많이 연구하고 이념에 대해 적게 말하자!”고 말했습니다. 만약 당시의 중국 지식인들이 이 말을 유념하여 공산주의 이념에 이끌리지 않았더라면 이후 몇 십 년 동안 중국에 끊임없는 재난을 가져다주고 있는 공산당은 없었을 것입니다. 현재도 똑같은 상황이 아닐까요? 중국이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중공 해체, 중공의 세뇌 제거, 미래 중국의 근본적 가치를 찾는 것이지 공허하게 주의를 가지고 논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는 일종 통치방식이지 절대의 경전이 아닙니다. 중화민국의 역사로부터 보면 쑨중산(孙中山, 손문) 선생은 군정(军政), 헌정(宪政), 훈정(训政)의 민주 3단계를 말했습니다. 장제스(蒋介石) 선생과 장징궈(蒋经国) 선생은 이 3부곡을 충실히 이행했기에 민주국가가 나왔습니다. 그럼 중국 본토는요? 우리는 첫걸음조차 내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우선 착실하게 중공을 해체하는 일부터 해야 실속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