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쩌민의 한 마디에 후진타오 군부에서 배제당해

郭伯雄如何架空胡锦涛?只因江泽民一句话

후진타오가 허수아비가 된 비극을 목격한 시진핑은 퇴직 원로의 정치 간섭 철저히 거부했다. (GOH CHAI HIN/AFP/Getty Images)

 

 

후진타오가 중공 총서기로 재임한 10년은 ‘공회전 10년’ 혹은 ‘허수아비 10년’이라고 불렸다. 이런 별명의 왜 붙었을까? 홍콩 잡지 ‘동향(动向)’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 16대가 시작되자마자 장쩌민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위원회 주석 직을 유지했고, 이어서 개최된 제1차 군사위 회의에서 궈보슝을 상무 부주석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후진타오는 허수아비가 되어갔다.

 

후진타오는 국가주석에 오르고 2년 후 군사위원회 주석을 장쩌민으로부터 양도받았지만, 국가 주석 10년, 군사위 주석 8년의 기간은 유명무실이었다. 최근 홍콩 잡지 ‘동향’은 후진타오가 허수아비가 된 과정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중공 16대가 시작되자 장쩌민은 장완녠 등을 움직여 군사위원회에서 군사위 주석의 신분을 2년 유임 받는다. 이후 군사위 주석의 신분으로 군사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군사 업무를 2원화하는 분업체제를 제기했다. “궈보슝 장군을 군사위 상무 부주석으로 하여 중앙 군사위 일상 업무를 주관하게 하고, 쉬차이허우 장군은 군대 정치 사업을 책임지게 할 것을 건의한다.” 바로 이 제안으로 인해 군대의 모든 일이 후진타오의 손을 떠나 두 사람에게 맡겨졌다.

 

궈보슝은 2002년 11월부터 2012년까지 10년 동안 중공 16기. 17기 정치국 위원 겸 군사위원회 상무 부주석이 되었다. 그는 1999년 10월부터 군사위원회 위원, 상무(제1) 부총참모장(副总参谋长)으로서 3군의 전쟁준비, 군사훈련, 군대업무 심사를 했으니 그는 군부의 일상 업무를 장장 13년간 주관한 셈이다. 이 기간, 궈보슝은 쉬차이허우와 손잡고 매관 매직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 세력을 불려나갔다. 군사위 주석 후진타오의 영향력은 급속히 미약해져갔다.

 

지난 해 3월 9일 홍콩 펑황(凤凰) 위성 TV는 양춘창(杨春长)소장 등을 인터뷰 했다. 일찍부터 쉬차이허우를 “직접 시중들었던” 양춘창은 쉬차이허우의 매관매직을 밝히면서 군대가 “그들의 집이 됐고, 당시 군사위 지도자는 허수아비가 되었는바, 이 문제는 아주 복잡하다.”고 말했다.

 

이로써 양춘창은 후진타오 군권이 허수아비였음을 처음으로 밝힌 군부 고위 인물이 됐다. ‘총’은 중공의 모든 지도자에게 생명처럼 간주된다. 마오쩌둥은 린뱌오 사건 후 4개 야전군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6대 군구 체제로 전환하면서 자기 인물을 심었다. 덩샤오핑은 최고 지도자를 해 보지는 않았지만 군권을 장악하여(1983년 6월 6일~1990년 3월 사이에는 군사위 주석) 중공 총서기 두 명을 폐위 시켰다. 덩샤오핑 이후 장쩌민이 군권을 잡았고, 장쩌민은 10년 후 퇴임해야할 시기에도 군권을 놓지 않았기에 후진타오는 줄곧 장쩌민의 그늘에 가려 아무 것도 하기 어려웠다. 장쩌민은 후진타오가 집권한 10년 동안 81빌딩의 사무실을 계속 유지했고, 공식 석상에서는 항상 후진타오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81 빌딩 사무실이 폐쇄된 것은 18대 시진핑 체제가 출범하면서였다. 81빌딩은 베이징 부흥로 7번지로서 중공중앙군사위 판공실로 설치된 곳이다.

 

링지화 낙마 후, 중국 언론 재신망은 “링지화는 일찍부터 저우융캉, 보시라이와 ‘정치연맹’을 결성했고, 이런 관계를 통해 장파 핵심인물은 음모와 궤계를 꾸몄다.”고 폭로했다. 후진타오는 군부에서 궈보슝과 쉬차이허우에게 배제 당했고, 공안, 사법, 국가안보 측면에서는 저우융캉 정법위 서기에게 권력을 빼앗겼으며, 지도자 권위 차원에서는 항상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장쩌민의 제약을 받은 데다가, 비서 링지화의 “주인 배반”으로 나머지 일들에 있어서조차 허수아비가 되었다. 바로 이런 ‘네 가지 허수아비’ 상황에서 10년 동안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NTD 뉴스 장숭펑(张松风)

 

책임편집: 탕루이(唐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