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말았어야 할 생명

 

 

 

66명의 젊은 생명이 늑대에게 먹혔다.(인터넷사진)

 

중국 잡지 ‘위화’(雨花)의 2005년 제5권에는 펑위안리(冯远理) 선생의 <사라지지 말았어야 할 생명>이 발표되었다. 지금은 이 글이 발표된 지 10년도 더 지났다. 글의 내용은 1970년에 벌어졌던 참혹한 사건에 대한 상세한 회고다. 그 내용이 여전히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에 여기서 소개한다.

 

1970년 3월, 신병 200여 명으로 구성된 중공군이 야간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이른 봄, 훈련지였던 청장고원(青藏高原)의 추위는 여전히 매서웠다. 칭하이 구이더현(青海贵德县)에 한 행군 대열이 나타났다. 이는 장쑤, 저장 두 성에서 온 200여 명 신병 훈련 부대였다. 그들은 멀리 구이난(贵南)으로 들어가서 서쪽으로 황하를 건너 야영하는 훈련을 진행 중이었다. 이 날, 부대는 호랑이 마루라 부르는 인적 없는 황량한 산마루를 3리 앞두고 숙영 준비를 했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하루 종일 걸은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때 한 신병이 부대 꽁무니 쪽에 늑대 몇 마리가 살금살금 접근하는 것을 발견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늑대 수는 조금씩 많아졌다.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산간을 공포스럽게 떠돌았고 늑대는 어느새 40~50 마리로 늘었다.

 

현지 출신의 유목민 길잡이는 중대장에게 가서 병사들 총에 탄알이 얼마나 있는지를 물었다. 중대장은 이들이 모두 신병이어서 총을 쏴 본 적이 없으므로 총에는 탄알이 한 발도 없다고 대답했다.

 

길잡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중대장과 지도원에게 말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상황이 위태롭다. 이 늑대들은 사방 몇 리 안의 늑대를 다 불러올 수 있으니 행로를 바꾸어 황하를 건너 서쪽으로 가야한다’고  제안했다. 왜냐하면 늑대는 강을 경계로 하여 세력범위를 나누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도원은 이모저모를 따져보더니 길잡이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가 내세운 이유는, ‘혁명전사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산을 만나면 길을 뚫고, 강을 만나면 다리를 놓는데 어찌 늑대 몇 마리에 겁을 먹는단 말인가. 그러므로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반드시 급속 행군으로 호랑이 마루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날이 완전히 어두워 졌을 때 대오는 아직 호랑이 마루에 도착하지 못했고, 부대 주위에는 늑대 몇 백 마리가 모여 들었다. 늑대들은 부대가 반드시 지나야 할 큰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다. 부대는 부득이 산 어귀의 오솔길을 통해 그곳을 빠져나가야 했고, 이는 바로 늑대가 원했던 상황이었다.

 

제일 먼저 1분대가 오솔길을 걸어 나가자 늑대가 세 무리로 나뉘어 200여명을 단번에 포위했다. 한 무리는 1분대 뒤의 오솔길을 막았고, 한 무리는 오솔길 입구를 막았으며, 나머지 한 무리가 1분대를 포위했다. 늑대들은 이렇게 1분대를 2,3,4분대와 완전히 격리하는데 성공했다.

 

늑대들의 작전은 완전히 성공했다. 2, 3, 4 분대가 늑대와 대치하고 있는 동안 1분대 62명은 몰살당했다. 온전히 보전된 시신은 4구뿐이었고 일부는 전신이 갈갈이 찟겨 내장이 도처에 널려있었으며, 대부분은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었다. 공기 중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1분대 62명 외에도 길잡이 1명, 2분대의 관병 3명도 같이 사망하여 총 66명의 생명이 사라졌다.

 

저자 펑위안리는 마지막에 말했다. “어쨌거나 나는 이 침통한 사건으로 인해 간부 몇 명은 준엄하게 처벌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처리 결과를 본 나는 참으로 할 말이 없었다. 지도원과 중대장에 대해서는 어떤 처분도 없었고 오히려 중대장은 10년 후 연대장으로 승진했다.”

 

1970년, 중국의 어린 신병 66명이 순식간에 늑대 떼에게 먹혀버렸다. 너무도 끔찍한 이 사건에 처벌받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황당한데, 사건과 그 처리 결과가 세상에 알려지는 데는 또 35년씩이나 필요했다. 

 

책임편집: 수이스(隋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