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오페이] 소련해체역사와 중공의 운명

 

[자오페이]

2016년 새해가 시작하자 많은 프로그램이 2016년 한 해의 사건을 예측했습니다. 우리 마이크로 뉴스는 예언자도 아니고 초능력도 없으므로, 단순히 역사상의 사례를 근거로 추측해 보겠습니다. 현재 중국은 중공이라는 부체(귀신)가 붙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비교해 보기 가장 좋은 사례는 해체 전의 소련입니다.

 

소련의 해체는 소련공산당(이하 ‘소공’) 28차 대표대회 1년 후에 벌어졌습니다. 1990년 7월에 소공 28차 대표대회가 있었고 소련의 해체는 1991년에 벌어졌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이를 매우 뜻밖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너무 뜻밖이기에 어떻게 보면 하늘이 한번 실험을 해본 것 같기도 했습니다.

 

28대 대회에서 소공은 앞날에 관한 이견으로 논쟁이 매우 치열했습니다. 사람들이 공산당을 혐오하고 버리기 시작하여 1990년 상반기 6개월 동안 37만 1천명이 탈당했기 때문입니다. 소공은 자구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대표대회에서 많은 파벌들은 제각기 자신을 위한 주장을 폈습니다.

 

대회 이틀째가 되자 대회장 내에서는 옐친을 대표로 하는 ‘민주 강령파’ 지지자 몇 천 명이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소련 공산당을 폐하고 ‘민주 사회주의당’으로 개명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바로 공산주의를 포기하겠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파는 ‘마르크스주의 강령파’인데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 마르크스주의 원리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는 공산당 내부로부터의 첫 번째 분열이었는데, 아주 유감스러운 것은 고르바초프가 이 기회를 포착하지 못하고 중도를 걸어간 것입니다. 그는 소련 공산당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진행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인지, 소공 탈당 인원수는 28대 이후 급증하여 90년 8월부터 91년 7월 사이에 420만 명이 당증을 공식 반납했습니다. 옐친은 28대 이후 서둘러 탈당했고 1991년 6월 높은 득표수로 러시아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소련의 가맹국들도 연방을 탈퇴하기 시작해 소비에트연방은 자유를 향해 해체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소련공산당의 강경파는 상황이 악화되어가자 1991년 8월 19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모스크바에 탱크를 몰고 가 고르바초프 총서기를 연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러시아 대통령 옐친이 거리로 나서서 온 몸으로 호소하자 군인들이 자발적으로 시가지를 벗어나서 쿠데타가 실패할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총서기직을 사퇴하고 소련공산당 해체를 ‘건의’했습니다. 사실상 모두에게 해체를 선언한 것이고 이로써 소련공산당은 역사의 쓰레기로 전락했습니다. (하늘의) 소련공산당 해체 실험은 이렇게 두 번째 시도에서 성공했습니다.

 

중공은 현재 소련과 똑같은 상황입니다. 공산당 체제 내의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은 난항을 겪고 있고 신앙, 도덕과 환경파괴에 대해서 국민들은 혐오하게 되었으며, 2016년 1월 4일까지 이미 2억 2천 3백 만 명이 당단대(党团队)에서 탈퇴했습니다. 중공은 2017년 19대 대회에서 해체의 위기를 맞고 당명이 바뀌고 많은 이가 퇴진할 것입니다. 만약 이때 해체되지 않으면 2017년 10월부터 2018년 연말 사이에 국민들에 의해서 퇴출당할 것입니다.

 

2016년 중국은 경제, 환경, 사회의 위기가 더욱 심각해지고, 군부개혁과 19대 정권 장악을 둘러싼 권력투쟁도 더욱 치열해질 것입니다. 중공은 붕괴의 임계점에 놓이게 되고, 옐친과 같이 식견이 탁월한 사람이 나타나 중공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공이 죽기 직전 마지막 식사시간의 모습일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짚어드리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중국의 고르바초프가 누구냐고 질문하지만, 이 질문은 오류입니다. 중국의 옐친이 누구냐로 질문이 바뀌어야 합니다. 고르바초프는 타의에 의해 공산당을 포기했지만 옐친은 자의에 의해 포기했습니다. 역사적 공적을 따지면 1등 공적은 옐친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실제 역사도 옐친에게 당연한 영광을 주었고 그는 은퇴할 때 까지 러시아 대통령직을 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