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더장의 앞날 (1) 홍이대 (한)

 

(사진=대기원)

 

현재 중국의 권력층 구조는 홍이대(紅二代, 훙얼다이)와 관료출신 고관들로 구성된다. 홍이대는 보통 공산당 고관의 자제로 알고 있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혁명 1세대 공산당 지도부 자제들을 뜻한다. 그러므로 공산당 내부에서 고위직에 올랐어도 홍이대에 끼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혁명 1세대 고관들은 중난하이(中南海)에 모여 살고 자제들 역시 그곳에 살면서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을 같이 보냈다. 1세대끼리 정치 투쟁이 아무리 가혹해도 골수 공산당원과 자제들은 모두 당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개인적 입장을 부차적으로 놓는다. 이리하여 홍이대는 선대의 정치투쟁과 관계없이 자신들만의 끈끈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1981년 실권을 장악하고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한 과감한 개혁개방을 단행했다. 그가 중요시한 인재는 공산주의 이념이 있으면서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고 그들과는 달리 경제적 개혁을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경제운용의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덩샤오핑은 혁명 원로와 상관없는 사람을 발탁했다. ​바로 후야오방(胡耀帮), 쟈오쯔양(赵紫阳), 이후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등이었다. (후아오방과 자오쯔양은 혁명 1세대이기는 하다.)

 

덩샤오핑은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자신의 왼팔 오른팔이라 불렀고, 그들은 덩의 경제개혁을 함께 추진해 나갔다. 정치개혁도 실시해 정부의 투명성을 강화했고 공무원의 책임성을 요구했으며, 언론 출판의 자유도 중시했다. 한편 반부패 운동도 전개하여, 당 고위간부의 자녀들조차 반부패 표적으로 삼았다. 티베트에 대해서는 잘못된 점을 사과했고 티베트의 자치권을 확대해 주려고 했다.

 

후야오방, 자오쯔양 두 사람과 덩샤오핑의 주도로 중국이 변하고 있었지만 더불어 민주화에 대한 지식층의 열망도 커져갔다. 결국 1989년 후야오방 장례식을 위해 천안문에 모인 학생들은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시위를 시작했다. 유감스럽게도 덩샤오핑은 이런 흐름을 수용하지 못하고 무력 진압을 선택했다. 여기에 강경 보수파의 힘이 가세하여 이른바 “6.4 천안문 유혈사태”가 벌어진다. 학생 운동에 지지를 보냈던 자오쯔양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 가택연금 상태에 처한다.

 

이때 자오쯔양의 후임으로 장쩌민이 물망에 올랐다. 6.4 강경진압에 찬성해 공산당 강경파의 지지를 얻은 동시에 개혁 개방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후일 개혁개방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고 실망한 덩샤오핑은 후진타오를 장쩌민의 후계자로 지목하고 육성하기 시작한다.

 

1992년 덩샤오핑의 후광을 얻은 장쩌민이 먼저 중국공산당과 국가의 최고 권좌에 오른다. 지위는 높지만, 혁명세대와 후손의 틈바구니에서 아무런 권위가 없는 장쩌민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는 혁명세대와 상관없는 사람을 발탁해 요직에 앉혀야 했다. 그런 사람을 휘하에 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권력을 주어 돈을 벌게 하고 돈 상납과 충성을 약속받으며 세력을 강화하는 ‘부패치국’이었다. 1997년 덩샤오핑이 사망하자 후진타오의 든든한 후원자가 사라졌다. 2002년 장쩌민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른 후진타오는 재임 10년 간 허수아비 노릇밖에 못했다. 요직이란 요직에는 모두 장쩌민 인맥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권좌에서 내려온 후에도 실권을 유지한 장은 20년 동안 ‘부패치국’을 유지했고, 그 결과 전국을 부패의 늪에 빠뜨렸다. 중국의 많은 지역이 부패관료의 천국이 된 것은 필연이었다.

 

현재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 7명 중, 장가오리(张高丽), 장더장(張德江), 류윈산(劉雲山)은 장쩌민 계파이다. 이미 실각한 저우융캉(周永康), 쉬차이허우(徐才厚)는 물론이고 홍콩 행정장관 렁춘잉(梁振英), 실각을 눈앞에 둔 궈보슝(郭伯雄)은 모두 혁명 1세대도 아니고 홍이대도 아니다. 그들은 정통 공산 귀족의 머슴에 지나지 않는다. 이 머슴들은 20년 간 암세포처럼 퍼져 정권을 붕괴 직전까지 몰아갔다. 이대로 두면 정권이 붕괴되고 따라서 홍이대들은 귀족 신분을 잃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시진핑의 부름에 홍이대 2천명이 일시에 모여 시진핑을 지지했고, 공산당 원로들이 강력하게 반부패를 후원한 것은 모두 이런 맥락이다.

 

태자당 인물 중 처벌받은 사람은 보시라이(薄熙來) 뿐이다. 보시라이 입장에서 최고 권좌에 앉은 머슴들(후진타오, 원자바오)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겠는가? 보시라이는 저우융캉을 시켜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통신을 겁 없이 도청하다가 들켰다. 그래도 처벌 받지 않았던 보시라이는 최고 권력 후보자 시진핑을 쿠데타로 몰아내려 했다가 발각되었다. 시진핑의 등극은 중국공산당 전체 합의사항으로 보시라이 개인이 뒤엎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며, 만일 뒤집어지면 공산당 전체에 대 환란이 올 것이다. 뜻을 모아 ‘안정을 유지’하면서 정권의 위기를 넘겨야 할 때, 안정과는 정반대 행보를 걸은 보시라이는 태자당 신분으로도 처벌을 면하기 어려웠다.

 

현재 홍이대에 속하면서 장파 핵심인물에 해당하는 사람은 쩡칭훙(曾慶紅) 한 사람 남았다. 그는 지금 연금 상태에 처해있다고 한다.

 

NTD Korea 김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