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ntdtv.co.kr 2014-12-09 04:02 AM]
1989년 6월4일 중국에서는 천안문 대학살이 있었다. 대학살에 참여 했던 한 중공 병사가 당시 천안문 광장 하수도를 통해 사망자 시신을 운반 처리했다고 밝힌 것이 한 중국어 국제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 사이에서는 큰 논란이 일었다.
12월 8일, 해외 보쉰 사이트는 6.4사건 정보를 여러 번 제공했던 중국 네티즌 루스선(陸士紳)이 또 다시 놀라운 소식을 보내왔다고 서두를 꺼냈다. 1989년 천안문 대학살에 참여했던 중공 군 병사가(ID : annoymious) 학살 후 시신 처리 과정을 폭로한 것이다.
어노이미어스(annoymious)는 천안문 학살에 참여하여 학살 후 3개월 간 현장에서 근무했다. 그가 속한 부대는 그 후 전체가 퇴직하며 퇴직금을 받았다. 이때의 경험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악몽이 되었다.
[어노이미어스]
“우리 중대는 학살 후 꼬박 이틀 낮 하루 밤을 시신처리에 보냈습니다.”
시신이 천안문 광장 하수도 입구로 운반돼 오면 그들은 아래에서 자루에 받아 넣었다. 시신 하나가 내려오면 자루에 넣고 끈으로 동여매서 하수도 안에 한 줄로 서있는 병사들에게 넘겨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이틀 낮 하루 밤을 일하여 천안문 광장에 쌓여 있는 시신과 인체 잔해를 전부 하수도를 통해 없애버렸다.
[어노이미어스]
“그 시신들을 최종적으로 어디서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릅니다.”
그는 그 때 아직 20살도 안 되었고. 그가 속한 중대의 어떤 병사는 그 공포를 견딜 수 없어 미치기까지 했다고 했다.
천안문을 떠나 주둔지에 돌아온 3달 후 이 일에 참여했던 병사 전부를 퇴직시킨다는 발표가 났다. 그들은 제대한 것이 아니라 퇴직만 하여 오늘까지도 퇴직연금을 받고 있다.
퇴직하여 부대를 떠난 후 그들은 “누구도 이 일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비밀을 누설한 자는 가차 없이 총살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그때부터 적지 않은 전우가 정신병에 걸렸고 또 몇 사람은 정신적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자살까지 했다.
그는 자신 ‘역시 지금까지 줄곧 불면과 악몽에 시달렸다. 이런 속사정을 타인에게 공개하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네티즌은 놀라움을 표시했다. 네티즌 아딩(ading)은 댓글을 올렸다. “천안문 학살 당시, 사람들은 모두 장안가(長安街)에서 지게차가 사람을 들어 올리는 것은 보았지만 (들어 올려 진 사람이) 나오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정말 죽은 사람이 없는 것인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는데 시신들이 모두 이렇게 사라진 것이었구나!”
네티즌 친류(qinliu)는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이것이 바로 ‘국가기밀’이다! 나치 수용소의 화장로는 파쇼의 기밀이고, 수용소 군도의 인간 지옥은 스탈린의 기밀이며. 6.4 시체를 유기하고 증거 인멸한 것은 덩샤오핑 일당의 기밀이고, 3,000만 농민을 굶겨 죽인 것은 마오쩌둥의 기밀이다. 또 무슨 ‘기밀’이 있는가??? 모든 기밀은 언제나 폭로되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남이 모르게 하려면 아예 일을 저지르지 마라.”
하지만 이 소식과는 다른 소식을 전하는 사람도 있다. 네티즌 ‘생존자’는 말한다. “하수도로 시신을 운반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다. 헬기로 하면 더욱 빠르지 않는가? 실제로 탄압 이튿날, 많은 중 헬기가 계속 광장에서 떠서 서남방향으로 날아갔는데, 왜였는지 계속 이유를 몰랐었다.”
금년 6월, 6.4 대학살을 직접 목격한 우하이보(吳海波)는 NTD와의 특별 인터뷰에서, 당년 그는 천안문 광장에서 증공군 탱크가 이리저리 오가며 사람들을 사살하고, 군 헬기가 시신을 운반하던 장면을 직접 봤다고 밝혔다.
우하이보는 말한다. 당년 6.4 대학살 때 그는 아직 예술대학 2학년 학생이었다. 그는 사진기로 많은 장면을 기록했다. 그는 렌즈를 통해 한 여학생이 탄알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았는데 이 장면은 그의 기억에서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다. 학교에 다니기 전 그는 군대에 3년간 복역했다. 그는 자신이 피땀 흘려 몸 바친 군대가 자신의 학생과 국민을 탄압했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고 한다.
1989년, 우하이보는 예술대학 2학년 학생이었다. 4월 17일부터 6월 9일까지 그는 자신의 사진기로 광장 상공의 헬기를 기록했다. (우하이보 제공)
1989년, 우하이버는 예술대학 2학년 학생이었다. 4월 17일부터 6월 9일까지 그가 자신의 사진기로 기록한 장면은 십 수 만 개나 되었다. (우하이보 제공)
1989년, 우하이버는 예술대학 2학년 학생이었다. 4월 17일부터 6월 9일까지 그가 자신의 사진기로 기록한 장면은 십 수 만 개나 되었다. (우하이보 제공)
NTD 뉴스 중리수(鍾離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