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해군 사령 장딩파의 후진타오 황해 암살 미수기(한,중)

[www.ntdtv.co.kr  2014-11-20 09:55 PM]​​ 

 

 중국 본토 언론은 희귀하게도 ‘후진타오 황해 암살’ 내막을 보도했다. 해외 언론에 장-쩡 집단이 시진핑을 6번이나 암살하려 했다는 내막이 보도된 바는 있었다. 지금 갑자기 중국 본토 언론이 ‘후진타오 암살 미수’의 상세한 과정을 폭로한 것은 시 진영에서 장 집단에게 다시 경고를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인터넷사진)

 

중공 전 총서기 후진타오 재임 중, 장-쩡 세력은 그를 세 차례 암살하려 했다. 해외 언론에서는 이미 후진타오의 암살 내막이 상세히 보도된 바 있다. 또한 2012년, 중공 내분이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을 때 중국 바이두(百度) 사이트도 잠시 ‘후진타오 암살시도 사건’을 보도한 적이 있다. 근일, 중국 본토 언론은 희귀하게도 ‘후진타오 황해 암살’ 내막을 보도했다. 해외 언론에 장-쩡 세력이 시진핑을 6번 암살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내막이 보도된 바는 있었다. 지금 갑자기 중국 본토 언론이 ‘후진타오 암살 미수’의 상세한 과정을 폭로한 것은 시 진영에서 장 집단에게 다시 경고를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11월 13일, 중국 지난핫라인 사이트 군사 칼럼에 ‘장딩파(張定發) 황해 암살시도 사건’이란 제목의 문장이 나타났다. 문장은 후진타오가 2006년 해군 북해함대를 순시할 때 당한 암살 시도의 과정을 과도할 정도로 상세히 묘사했다.

2006년 5월, 후진타오는 황해 북해함대를 시찰하면서 가장 최신예 미사일 구축함에 앉아있었다. 갑자기 두 척의 군함이 후진타오가 탄 구축함을 향해 동시에 사격을 시작해 해군 병사 5명이 사망했다. 후를 태운 미사일 구축함은 급박히 머리를 돌려 전 속력으로 함대 훈련 해역을 벗어났다.

암살 재시도를 피하려고 후는 군함의 헬리콥터를 타고 칭다오 기지로 날아간 후, 베이징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바로 윈난으로 날아갔다. 그가 베이징에 얼굴을 드러낸 것은 한 주일이 지나서였다.

2006년 12월 14일 해군사령 장딩파(張定發)가 세상을 떠났는데, 관가에서는 의외로 조문 하나 없었고 추도사도 없었으며, 신화사, 해방군보에도 아무 언급이 없었다. 다만 2006년 12월 17일 해군의 ‘인민해군보’ 첫 면에만 간단한 소식이 실렸는데, 장딩파의 사망 소식과 아주 간단한 경력을 보도했을 뿐, 흑백 사진마저 싣지 않았다.

 

장딩파는 골수 장쩌민파이며 당시 국제사회는 그가 암살과 관계있다고 추측했다. 그 후, 해군 수장은 후진타오에게 충성하겠다는 긴급태도 표시를 하여 후진타오의 용서를 구했다.

해외 언론이 일찍이 폭로한 바에 따르면, 이런 일이 있은 후 체포된 함정 관원은 ‘암살 명령은 장쩌민이 내린 것이며 군부내 장쩌민 심복인 해군사령원 장딩파가 집행했다고 했다.

 

후진타오는 세 번, 시진핑은 여섯 번 암살 조우

황해 암살까지 합해 후진타오는 부임 후 적어도 세 번 암살 기도 당했다. 홍콩‘ 동향’ 잡지의 보도를 따르면, 2007년 10월 2일, 후진타오는 상하이 서쪽교외 호텔에서 베푼 2007년 여름철 스페셜 올림픽 개막식 연회에 국제 귀빈으로 초대되어 참석했다. 보위부서에서는 후가 머문 상하이 서쪽교외 호텔 차고에 주차된 식품 전용차 기사 방석 밑에서 시한 장치가 달린 2.5kg의 강력 폭발물을 발견했다고 한다. 당시 홍콩 언론은 ‘상하이는 장의 소굴로서 이번 암살 기도도 마땅히 장쩌민 집단이 배치했을 것’으로 분석했다.

2009년 4월 23일, 장파 세력은 또 다시 청해 해역 열병식에서 후진타오를 사살하려 모의했다. 후진타오는 비밀 보고를 받은 후, 암살 시도를 사전에 와해 시켰다.

현임 중공 총서기 시진핑도 빈번히 암살 기도에 마주쳤다. 홍콩 ‘동향’ 잡지 8월호는, 시진핑은 6번 암살에 조우했으며, 심각하게도 모두 내부인이 킬러를 고용하여 저지른 범죄사건이었다고 폭로했다.

홍콩 ‘태양보’는 평론에서, 중공 18대를 전후하여 낙마한 보시라이, 쉬차이허우, 저우융캉은 모두 시진핑을 해치고 암살하고 정변까지 발동할 힘과 수단을 가진 인물들이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