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린 또 다시 장파 배반 의사 표시

[www.ntdtv.co.kr 2014-10-23 03:55 PM]​

장파의 색깔이 진하다고 전해진 중공 전 정치국 상무위원 자칭린(賈慶林)이 최근 갑자기 칭화대학 ‘연구상황을 시찰’했다는 소식입니다. 국제사회는 이는 전에 이어 또 한 번 장파에 대한 ‘배반’ 의사를 표시한 것이 아니냐고 해석합니다. 이와 동시에 예전부터 보시라이와 관계가 밀접하다고 알려진 자오번산(趙本山)도 시진핑의 강연 내용을 공부하느라고 ‘잠을 자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공개적으로 태도를 표시했습니다. 한 때는 장파의 핵심이었던 인물들이 4중전회 전에 서둘러 입장을 표시하는 것은 시진핑의 강경한 반부패 앞에서 장파 진영이 분열 와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한 평론은 지적했습니다.

 

자칭린, 얼굴을 보이더니 ‘칭화계’를 추켜주다

 

중공 관영 언론 신화망이 10월 17일 칭화대학 뉴스망 보도를 인용한데 따르면, 10월 14일 오전, 전 중공정치국 상무위원이며, 전 전국정협 주석이었던 자칭린이 갑자기 칭화대학에 나타나 칭화대학 교장 천지닝(陳吉寧)등의 수행 하에 ‘연구상황을 시찰’했다 합니다.

 

자칭린은 먼저 화학계에 와서 재료학원과 화학계에서 석묵알켄(graphite alkene) 대량생산 및 응용에 관한 연구의 일부 상황을 참관했습니다. 그런 다음, 자칭린은 칭화대학 우주비행 기술연구센터 그리고 광대역망 정보 2진화 저장장치 실험실 등을 참관했습니다.

 

관찰가는, 자칭린이 참관 후 칭화대학이 얻은 계열 연구성과를 보니 ‘대단히 분발’했음을 느낀다고 한 발언을 관영 언론이 강조 보도한 것에 주목합니다.

 

이미 퇴직한지 오랜 전 정치국 상무위원 자칭린이 근간에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4중전회 직전에 칭화대학에 가서 긍정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은 정치적 의미가 충분하다고 외국 평론은 지적합니다.

 

이는 자칭린이 두 번째로 시진핑 진영과 관계하여 ‘모습을 드러낸’ 일입니다. 우선, 중국 관영 신문 ‘푸젠(福建)일보’ 보도에 따르면, 자칭린과 전 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이자 전 중기위 서기였던 허궈창(賀國強)은 8월 24일 저녁 푸젠성 가무극원이 창작 연출한 대형 가무극 스하이망쉰(絲海夢尋) 관람을 위해 국립 대극장에 초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공연을 함께 관람한 사람은 중공 국무원 부총리 류옌둥(劉延東), 중선부 부장 류치바오(劉奇葆), 그리고 전 국무원 부총리 우의(吳儀)입니다. 당시 한 분석가는, 자칭린이 보시라이를 낙마시킨 시-후 진영 사람들과 함께한 것은 ‘배반’할 조짐을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시, 후, 주는 칭화대학과 관계 밀접

 

공개된 자료를 보아도 중공 고위층에서 시진핑 진영의 가장 중요한 핵심 인물 몇 명은 모두 칭화대학을 졸업했기에, 체제 내에는 심지어 ‘칭화계’라는 말도 돈다고 합니다.

 

1975~1979년까지 시진핑은 칭화대학에서 화공학을 전공했고 자칭린이 맨 먼저 시찰한 곳이 바로 화공계였습니다. 후에 시진핑은 푸젠성 위원회 부서기로 있으면서 1998년- 2002년 사이에 다시 칭화대학 인문사회학원 직장인 연구원 반에 들어가 공부했고, 후일에는 칭화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는 시진핑과 칭화대학의 관계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자료입니다.

 

후진타오와 그 아내 류융칭(劉永清)도 1959년 9월 칭화대학 수리공정계에 들어갔습니다. 두 사람은 학우였으며 또한 같은 학번 학생 중에서 나이가 가장 어렸습니다. 졸업 후, 후진타오는 학교에 남아 수리계에서 일하다가 1968년에야 칭화대학을 떠나 간쑤성의 수력발전부 류자샤(劉家峽) 공정국에서 근무했습니다.

 

후-시 연맹 중 가장 중량급 인물이 주룽지인데 그 역시 칭화 출신입니다. 1947년 19세의 주룽지는 칭화대학에 합격하여 전기계 전기제조를 전공했습니다. 1951년 1월에는 한 때 칭화대학 학생회장도 맡았었습니다.

 

자칭린은 상무위원 직에서 은퇴한지 이미 오래인데도, 칭화대학에 나타나 ‘연구상황을 시찰’했다는 표현으로 보도된 자체가 아주 심상치 않다고 분석가는 지적합니다. 중공 고위층의 관행은 퇴직 상무위원이 얼굴을 나타내려면, 어디에 가서 나타나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하겠는 지를 모두 보고하고 승인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움직임 속에는 흔히 특정 정치 신호와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자칭린이 4중 전회 전야에 칭화로 가서 칭화에 대하여 ‘분발했음’을 느낀다고 발언한 이것은 칭화대학에 대한 긍정으로서 ‘칭화계’ 출신인 시, 후. 주 등에게 가까이 다가서겠다는 신호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바꿔 말한다면 이는 자칭린이 또 한 번 공개적으로 태도 표시를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자칭린과 장쩌민 등과의 깊었던 관계를 볼 때 이번 거동은 이미 공개적인 ‘배반’이나 마찬가지로서, 지금 ‘반부패‘의 압력으로 궁지에 몰려 최후 발악을 하고 있는 장파로 말하면 사기를 저하시키는 무거운 타격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자오번산, 숙청당할까 두려워 긴급 태도표시

 

독불장군(獨不將軍)이라고 보시라이와 관계가 지극히 깊고, 한 때는 보시라이 ‘쿠데타 명단’에까지 휘말려 들어갔던 자오번산도 시진핑의 문예 좌담회 후 긴급히 태도를 표시 했습니다.

 

20일, 시진핑의 문예 좌담회에 참석하지 못한 자오번산은 선양 중심가의 ‘류라오건(劉老根) 대극장’에 달려가 ‘번산 탤런트 및 제작진 대회(本山傳媒演職人員大會)’를 그럴싸하게 거행했습니다. 목적은 문예 활동 좌담회에서의 시진핑의 ‘강연 정신’을 학습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보도에서는 자오번산이 회의에서 모두 연설을 40분이나 하면서 매우 ‘격동’했다든가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등의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

 

자오번산은 원래 보시라이 ‘쿠데타 명단’에 등재된 사람으로서 보가 정권을 탈취한 후 문화부장을 맡는다는 소문이 있었으니, 보시라이와의 관계가 극히 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시라이 낙마 후, 시-후는 정세를 안정시키고, 일이 너무 넓게 파급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오번산을 잠시 놓아주었습니다. 하지만 ‘반부패’가 점점 더 깊이 진행됨에 따라 자오번산에게도 좋지 않은 조짐이 서서히 나타났습니다. 우선 자오번산의 호화주택, 개인 전용기가 언론에 폭로되었고 이어서 자오번산의 새로운 드라마가 방송 직전에 긴급 중지 당했습니다. 이번 문예계의 중요 책임자 회의에도 시진핑의 냉대로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국외 독립 시사분석가 탕징위안.(唐靖遠)은 자오번산이 아무리 어리석다 해도 이런 기미는 눈치 채고 서둘러 태도 표시를 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탕징위안은 또 밝혔습니다. 자칭린과 자오번산의 태도표시는 형식이 다르긴 하지만 의미는 같은 것으로, 그들은 둘 다 장쩌민과 보시라이 집단의 핵심 인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거의 동일한 시간에 시진핑 진영에 서게 된 것은 장파라는 이 나무가 아직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원숭이가 이미 흩어져가는 현황을 선명히 드러내 보인 것이며, 또한 장파 내부가 붕괴 와해되는 절망적 상황에 처했음을 반영한 것입니다.

 

NTD뉴스 왕하이톈(王海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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