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충칭 사법국 국장 원창(文強). 사형 선고 받기 전날 저녁
그는 직접 자기 입으로 그가 12명 스타와 부정한 관계를 가졌다고 말했다.(인터넷사진)
[www.ntdtv.co.kr 2014-09-17 04:25 AM]
중공 관원의 음란함은 사람을 놀라게 한다. 전 충칭 사법국 국장 원창(文強)은 폭력범죄조직 방임 및 비호죄와 수뢰죄로 사형판결을 받았다. 사형 당하기 전날 저녁, 원창은 직접 자기 입으로 12명의 스타와 부정한 관계를 가졌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여 스타, 유명 여가수가 충칭에 와서 공연하게 되면, 그는 반드시 방법을 대어 그녀들과 관계를 가졌는데, 돈으로 사거나 사생활을 이용해 위협하는 방법 등을 사용했다고 술회했다.
2009년 8월 6일, 원창은 베이징에서 전국 사법청 국급(局級) 회의에 참가할 때부터 이미 거취에 제약을 당했고, 2009년 9월 26일, 전 충칭시 공안국 부국장 펑창젠(彭長健)과 함께 폭력범죄조직을 방임 및 비호한 죄와 수뢰죄 등 직무상 범죄로 경찰에 체포당했다.
‘쌍규’ 당한 후, 자신의 위법사실을 자백하지 않으면 고비를 넘기 어렵다고 생각한 원창은 일부 소녀를 강간하고 여 스타를 데리고 논 과정을 진술했다. 그는 또, “여 스타, 유명 여가수가 충칭에 와서 공연하게 되면, 반드시 방법을 대어 그녀들과 관계를 가졌는데, 돈으로 사거나 사생활을 이용해 위협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여 이런 스타들과 잠자리를 같이 했다”고 자백했다.
2010년 7월 6일, 원창은 수뢰 및 폭력범죄조직 방임 및 비호의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원창이 직접 자기 입으로 그가 12명 스타와 부정 관계를 가졌다고 말한 것은 사형당하기 전날 밤이었다. 그 중 한 명은 원창과 성관계를 유지한 지 3년이란다.
투옥 후의 원창
금년 4월 소식통의 제보에 따르면, 2009년 9월초 원창은 태도를 180도 바꾸어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소식통은 “그의 심리적 방어선이 무너졌다. 자신에 대한 범죄사실을 숨김없이 자백하면서 자발적으로 일부 사항을 보충했다.”고 했다.
원창은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살날도 며칠 안 남아서, 나에게 사형판결을 내리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지경에 이르러 상소한다고 해도 무슨 좋은 결과는 없을 것이다. 나는 공안에서 한 평생 일하면서 수많은 큰 사건을 처리했고 사람도 많이 죽였다. 예전에 나는 내가 어느 날 사형수 가족의 손에 죽을 수도 있겠다고 걱정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내 사람 손에 죽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나와 등을 진 그런 사람들은 나를 아무리 미워해도 나를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뜻밖인 것은 내 밑에서 먹고 살던 사람들이 한 손 거들어 우물에 빠진 내게 돌을 던지는 것이었다. 나는 이젠 분명히 알겠다. 내가 참여했고 내가 아는 일이 너무도 많은데 내가 죽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영원히 잠을 제대로 못 잘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 나를 죽이지 않으면 후환이 끝이 없을 거라 생각할 것이고, 따라서 내가 죽는 것이 그들에게는 훨씬 유리하다 판단할 것이다. 나는 지금 그들을 물속에 끌어들여 함께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면 내 아내와 아이도 대가를 치를 것이다.
모두들 나를 악마라고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부친이고 누군가의 남편으로서 가족에게는 그렇게 악독하지 않았다. 내가 얼른 죽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많기에 나는 그렇게 해줄 생각이다. 그러나 몇 마디 말은 가기 전에 분명히 해야겠다.
모두들 내가 그렇게 많은 돈을 탐오했고, 그렇게 많은 여자와 놀았다고 한다. 나는 이런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전부 내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의 책임이 크지만, 누구든 내 자리에 있다면 모두 그렇게 많은 돈을 탐오할 것이고, 그렇게 많은 여인을 데리고 놀았을 것이며, 심지어 더 심했을 수도 있다.
나 원창이 강간했다고 하는데 나의 행위를 강간으로 칠 수 있는가? 나는 단지 게임의 규칙에 따라 그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하는 그런 일을 좀 했을 뿐이다.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오늘날 한 관원이 탐오하지 않고 바람을 피우지 않으면 아무도 감히 그를 믿고 중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소용없다. 전국에 나 같은 이런 관원이 몇 백만은 안 돼도 적어도 몇 십만은 될 것이다. 단지 나 원창 하나만을 납작하게 만들고 죽여 버린다고 해서 무슨 해결되는 문제가 있겠는가?
나 이 원창은 고작해야 공안국 부국장일 뿐인데 도리어 충칭에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나에게 이런 권리를 준 사람은 누구인가? 나의 상급자들은 모두 뭘 하고 있었는가? 또한 내가 한 그런 일을 뻔히 알면서도 도리어 모르는 척 한 사람은 누구인가? 어차피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바에야 나는 모든 것을 시원히 다 말해 버리겠다. 내가 관여한 것은 그런 돈 정도가 아니다. 나머지는 모두 어디로 갔는가? 내가 남에게서 받은 것은 고작 사례금이었을 뿐이다.”
원창은 죽기 전에 저우융캉에 대해 말했을 지도…
보도에 따르면, 2010년 7월 6일, 당시 충칭시 공안국장이던 왕리쥔은 감방에 들러 자기가 체포한 원창을 만났다. 원창과 근 한 시간 밀담을 한 후 왕리쥔은 떠나갔다.
‘중국 청년보’는 원창이 죽기 전 최후의 며칠에 대해 보도한 바 있다. 보도문에서 기자는 ‘몇 장’의 자료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자료 일부’라는 표현을 썼다. 전 홍콩 ‘문회보(文彙報)’ 기자였던 장웨이핑(薑維平)은 ‘중국 청년보’의 기자가 사용한 양사(量詞)에 근거하여, 이는 원창이 모 고관에 대하여 진술한 내용이 아주 많음을 설명해 준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런 표현은 진정 최고의 가치가 있으며 가장 진실된 표현이라고 말했다.
장웨이핑에 따르면, 왕리쥔은 원창과 근 한 시간 대화하면서 틀림없이 원창의 아들을 조건으로 그와 흥정했을 것이다. 그는 원창이 아들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시라이도 원창의 아들의 복수가 가장 두려워 먼저 아들을 불법 체포했고, 결정적 순간이 될 때 까지 그를 인질로 삼아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는 왕리쥔을 보내서, ‘아들을 놓아줄 것이고, 한 번 만나보게 해주겠으니 그 대신 죽기 전에 반드시 입을 다물고 있어라. 네가 알고 있는 것을 뱃속에 묻어 두지 않으면 너의 아들을 ‘증거 인멸죄’로 처벌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 때문에 원창은 강경한 자세로 급변했다.
제보자에 따르면, 원창은 사형이 내정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목숨을 건지고자 저우융캉의 죄행을 고발하여 중요한 공적을 인정받으려 했다. 혹은 그것이 아니라, 원창은 저우융캉 일파의 흑막을 왕리쥔에게 알려 주면, 앞으로 판결을 뒤집을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며, 아들과 집사람에게도 일말의 희망이 생길 것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다.
2012년 2월 6일 왕리쥔은 보시라이에게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됐을 때, 자기의 상급자인 저우융캉을 찾아가지 않고 미국영사관으로 들어갔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는 원창이 저우융캉 관련 일부 비밀을 왕리쥔에게 알려 주었을 것이라 추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