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위펑(張玉鳳)은 마오쩌둥 생전의 기밀담당 비서관이자 생활 비서로서 마오의 만년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인터넷사진)
[www.ntdtv.co.kr 2014-09-12 03:17 AM]
중공 초대 당수 마오쩌둥이 사망한지 30여년이 돼가지만 중공은 그의 일생을 줄곧 국가 기밀로 취급했다. 근년 들어 마오의 생전 추문이 부단히 폭로되고 있으며 중국 본토 언론도 만년의 마오쩌둥 신변에 장위펑(張玉鳳), 멍진윈(孟錦雲) 등 여인 8명이 동반하고 있었음을 밝혀냈다. 최근 들어 언론은 마오의 생전 유언은 매년 장위펑이 성묘와서 그를 보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장위펑이라고 하면 많은 중국 사람은 생소하지 않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만년에 외국 정치 요인을 만나거나 국제적 친구를 만나거나 중공 당내 고위층을 접견하거나 늘 젊은 여자를 신변에 동반했는데, 그녀가 바로 마오쩌둥의 기밀담당 비서관이자 생활 비서인 장위펑으로서 마오의 만년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사람이다.
보도는, 만년에 신체가 몹시 허약해진 마오쩌둥은 번잡한 정치 환경 속에서 갈수록 무기력해 졌기에 그는 어떤 사람도 믿지 못했지만, 오직 장위펑 만은 믿었다고 전했다. 장위펑은 심지어 마오쩌둥 개인 금고의 열쇠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내부 투쟁이 끊이지 않는 중공 고위층 사이에서 그녀의 신분을 특수하게 만들었고, 장칭마저 장위펑에게 3푼을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장위펑은 1944년 헤이룽장성 무단장시에서 출생했다. 가정이 곤란하여 초등학교 6학년까지밖에 공부하지 못했는데 그 때 그녀는 겨우 14살이었다. 생활을 위해 그녀는 혼자서 일자리 찾으러 길을 떠났는데 마침 철도국에서 노동자 모집을 하고 있었다. 시험 삼아 응시 했던 그녀는 뜻밖에 합격되어 철도 여객 승무원이 되었다.
장위펑은 1960년대 무단장 철도국의 식당칸의 승무원, 방송원을 하다가 그 후에는 철도부 운송처에 전근하여 마오쩌둥 전용열차 승무원으로 됐다. 후에는 마오쩌둥이 전국을 순찰할 때 개인 전용열차 특실 승무원을 했고, 1970년 7월 후부터는 장기적으로 그의 기밀담당 비서관이자 생활 비서가 되어 마오쩌둥의 인생 최후 6년을 함께 동반했다.
1993년, 중공이 마오 탄생 백주년을 기념할 때, 인민대학 학생회는 학교 교수를 통해 장위펑 등 마오 신변의 근무자들을 초청하여 역사를 회고했다. 후에, 행사를 주선한 교수가 옛 원고를 정리하던 중 장위펑의 당시 발언 녹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리했다.
그 후 14년이 지난 2007년 장위펑 본인이 이 연설 원고를 감수한 후 ‘사회과학 논단’에 ‘마오쩌둥 만년 생활의 단편적 회고’란 제목으로 세상에 발표했다. 그중 한 대목에서 장위펑은, 마오쩌둥은 생전에 여러 번 그녀에게 말하기를,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매년 성묘하러 와서 그를 만나달라고 부탁했다고 피로했다.
마오는 신변의 다른 근무자들에게도 같은 말을 했다고 장위펑은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여러 해 동안 그녀는 마오쩌둥의 유언을 저버리지 않았다.
마오쩌둥이 유린한 여성은 천명도 넘는다
이에 앞서, 인터넷은 마오쩌둥이 만년에 총애한 두 여인이 장위펑과 수행 간호사 멍진윈(孟錦雲)이라고 폭로한 바 있다. 멍진윈은 14살 때 중난하이에서 개최한 한 차례의 무도회에서 처음으로 마오쩌둥을 알게 됐다. 비록 후에 ‘반혁명 현행범’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멍은 혐의에도 불구하고 마오의 신변에 남았고, 심지어 마오를 대신해 기밀문건 검열까지 했다.
2012년 6월, 해외의 한 사이트는 쉐징후이(xuejinghui)란 필자의 사설 ‘마오쩌둥 음란사 -그에게 유린당한 여성은 천 명을 넘는다.’에서, 마오쩌둥은 중난하이 외에도 많은 곳에서 황음 문란한 생활을 보내어서, 마오의 행궁이 있는 곳만도 전국 15곳이라고 폭로했다.
사설에 따르면, 마오쩌둥에게 유린당한 여자는 부지기수다. 그러나 다수의 이름난 여인들은 난을 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마오쩌둥은 감히 그녀들을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 없는 여자라면 운수가 좋지 못했다. 그에게 유린당한 후, 해남도 오지산, 대소 흥안령 등 세상과 격리된 곳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마오쩌둥에게 유린당한 여인은, 여 병사, 문공단원, 영화스타, 잡극스타, 접대원 등 많기로 몇 천 명이나 된다고 하니 마오쩌둥의 황음 문란에 대한 소문도 퍼질 대로 퍼져있다.
2004년, 장위펑이 3년에 걸쳐 쓴 회고록 ‘주석을 모신 나날의 추억’은 중선부, 마오쩌둥 사상연구실 등 여러 부서의 4달 가까운 심사를 거친 후, 발표하기에는 아주 부적절하다는 최종 판결을 받았다.
마오쩌둥의 딸은 백만 위안으로 판권을 전부 사들여 출판을 저지했는데, 이는 장위펑이 쓴 책 속에는 사람들이 모르는 마오의 추문이 있으며, 이것들이 진실한 기록임을 추측하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