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사 폭로: 덩샤오핑과 장쩌민의 부친(한,중)

장쩌민과 그의 부친은 둘 다 매국노다 (인터넷사진)

[www.ntdtv.co.kr 2014-08-22 05:04 PM]

일전, 중국에서 덩샤오핑 관련 기밀서류들이 공개되자 국제사회는 덩샤오핑 주제를 뜨겁게 다루었다. 지금 국제사회는 하나의 특이한 일에 주목하고 있다. 중공 2대(덩), 3대(장) 당수의 부친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덩샤오핑 ‘멸공’한 부친을 극력 회피

덩샤오핑은 16살에 고향을 떠나 94살 세상을 뜰 때까지, 78년간 그를 낳아주고 길러준 고향 쓰촨 광안(廣安)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다. “부귀를 얻고도 고향에 돌아가 보지 않음은 멋진 옷 입고 밤길 걷는 것과 같다.” 그의 그런 특이한 행위에는 필히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덩샤오핑은 회가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덩샤오핑 딸 덩룽(鄧榕)의 기억으로는, 덩샤오핑은 자식들 앞에서 그 자신의 부친을 언급한 적이 없다. 덩샤오핑이 회피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덩가 고택(故宅)을 현지 사람은 모두 ‘덩가원’이라 부른다고 자료는 말한다. 덩가원은 동서로 앉은 凹자형 건축으로서 사방을 둘러보면 아름다운 참죽으로 둘러싸였다. 부지 면적은 800평방미터를 넘고 방 17 칸이 있다. 명홍무(明洪武) 13년에 지었는데 이미 600여 년 역사를 갖고 있다. 덩가 3대 사람의 증개축을 거쳐서야 지금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고 패방촌으로서는 대부자 집인 셈이다. (패방牌坊-위에 망대가 있고 문짝이 없는 중국 특유의 마을 문, 충효, 절의를 지킨 인물을 기린다. 패방촌은 패방이 있는 마을)

덩샤오핑의 부친 덩원밍(鄧文明)은 20세기 초반 광안의 풍류 인물로서 아내 4명을 맞았다. 덩샤오핑의 생모는 그의 두 번째 아내였다. 덩원밍은 광안현 단련(團練 -청나라의 지주무장조직)국장을 했고 후에는 또 가로회(청나라 초기 민간의 비밀 결사 조직인 천지회天地會의 분파) 협흥향 분회의 장이 되어 여러 번 공산당이 도발한 폭동을 진압하고 많은 공산 비적을 살해했다. 1936년의 어느 날, 불상에 절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누군가에게 타살되었다.

어린 시절 생활은 모두 무척 자유스럽고 무척 풍족한 귀공자 생활이었다고 덩샤오핑은 회고했다. 덩의 어린 시절 부친은 광안현 경위 총장(警衛總辦)이었다.

덩샤오핑의 친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은 공산당원일 것으로 추측되는바, 자신이 공산당의 주요 지도자인 덩샤오핑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판단한다.

장쩌민은 매국노 출신인 부친 언급을 극력 회피

장쩌민의 조부는 장스시(江石溪)고, 부친은 맏아들 장스쥔(江世俊)이다. 장스시에게 자식 7명이 있었는데 그중 두 사람은 일찍 단명했고 여섯째 장스허우(江世侯 -즉 장상칭江上青)은 1928년 공산당 혁명에 참가하여 1939년 28세에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동갑 미망인 왕저란과 어린 두 딸 장쩌링, 장쩌후이를 남겼다. 맏아들 장스쥔은 일본군의 침략 때 매국노로 타락해 장가 가족의 치욕이 되었다.

누가 집권을 하든 매국노라면 사람들이 모두 미워한다. 그래서 장스쥔의 아들 장쩌민은 부친을 언급하길 두려워했다. 장은 친아버지를 언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이 중공 총서기로 있을 때, 정부(情婦)와 측근을 모두 고관으로 발탁시켜 그들이 마음대로 탐오부패하게 했지만 친형제자매와는 내왕하지 않으면서 단 한 사람도 발탁하지 않았고 후일에는 그들을 거의 인정하지도 않았다.

이 이해불능 현상의 원인은 덩샤오핑이 세상을 뜬 후에야 밝혀졌다. 덩이 사망한 후, 장쩌민은 삼권(三權)을 잡게 되자 일각도 지체할세라 전문 집필 팀을 조직해 자신의 전기를 쓰게 했다. 이 집필 팀은 전력을 다해 자료를 수집했으나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는 정치 업적을 찾아낼 수 없었다. 오히려 출신 위조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수치들을 여러 개 알아내게 되었다. 그러자 장쩌민은 몹시 화를 내면서 이 집필 팀을 즉각 해산시켰다. 하지만 사람의 입은 막지 못하니, 장의 추문은 계속 흘러나왔다.

장쩌민의 부친은 장스쥔이다. 1940년 11월 매국노 왕정위(汪精衛)의 일본 괴뢰정부가 성립된 후, 장스쥔은 장관첸(江冠千)이란 이름으로 난징에 몸을 의탁했다. 난징의 왕정위 괴뢰정부에서 선전부 부부장 겸 사론위원회 주임 위원을 역임하면서 ‘중화일보’ 주필 후란청(胡蘭成 -장아링의 전 남편) 수하의 대장 중 한 명이 되었다. 후란청과 저우줘런(周作人)은 나란히 당시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양대 매국 작가였다. 후란청은 중국을 떠난 후 일본에서 ‘역사의 소용돌이’란 책을 냈는데 책에 장스쥔(江冠千)이 그와 함께 일을 한 내력이 들어있다.

맏아들의 장래 출세를 위해 장스쥔은 장쩌민을 학비가 만만치 않은 양저우 중학에 보냈다. 또한, 그를 왕정위 괴뢰정부가 운영하는 중앙대학에서 공부시켰고 또 어려서부터 그에게 피아노 공부를 시켰다. 그 시대는 바로 중국 인민이 막심한 재난으로 도탄 속에 빠져있을 때여서 보통 사람은 생계도 유지하기 어려웠지만, 이 부잣집 도련님의 부친은 매국질을 하여 돈을 벌었다.

장쩌민은 집정한 후 양저우에 가서 조상의 제를 지내고 조상의 무덤을 재건하는데 국고 150만 위안을 썼다. 하지만 기록자는 괴상한 현상 하나를 발견했다. 장쩌민은 그가 7살 때 사망한 조부 장스시에 대해서는 쉴 새 없이 지껄이지만 그를 위해 심혈을 다한 친아버지 장스쥔에 대해서는 도리어 조심조심하면서 언급을 피하는 것이다.

장쩌민이 부친의 수치스러운 경력의 언급을 극력 회피하려 했지만, 2009년 12월 5일, 중국학자 뤼자핑(呂加平)이 이를 폭로했다. 뤼자핑은 중국 2전사 연구회(二戰史研究會) 회원이다. 그는 장쩌민의 ‘매국 두 건, 거짓 두 건’(二奸二假)을 폭로한 공개서한을 발표한 후 2010년 9월에 실종되었고 후에는 1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뤼자핑은 공개서한에서, 장쩌민 본인과 그의 친아버지는 모두 일본 괴뢰 매국노로서 이것이 첫 번째 매국이라 했다. 동시에 장은 또 러시아 스파이로서 KGB에 충성을 다하고 러시아에 대량의 중국 영토를 팔아넘겼다. 이것이 두 번째 매국이었다. 그중 두 가지 가짜란, 장쩌민은 또 1949년 이전에 중공 지하당에 가입한 척하는 가짜 당원이다. 동시에 또 중공의 이른바 ‘열사’ 장상칭의 양자인체하는 가짜 ‘열사 자제’이다.

NTD 뉴스 둥팡징(東方靖) 종합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