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중공 전 당수 장쩌민이 체포당하는 모자이크 사진으로서 지금 인터넷에서 광풍을 일으키며 퍼지고 있다 .
이는 민심의 흐름을 설명한다.(인터넷 사진)
[www.ntdtv.co.kr 2014-08-22 07:47 AM]
중국에 ‘핑(平)’이 둘 있다.
하나는 덩샤오핑, 하나는 시진핑
하나는 1983년에, 하나는 2013년에
하나는 봄에, 하나는 겨울에
하나는 동그라미를 그렸고, 하나는 선을 긋고
하나는 봄을 말했고, 하나는 겨울을 말한다
하나는 동그라미 속을 부자로 만들었고, 하나는 선을 넘은 자를 잡는다
하나는 가난을 만들었고, 하나는 탐오를 다스린다.
하나는 ‘중국특색’을 만들었고, 하나는 중국특 ‘색(色)’을 징벌한다
하나는 노호를 파직시키려 했고, 하나는 노호를 투옥하려 한다!
이는 얼마 전 한동안 중국 네트워크에서 열렬하게 전해지던 한 단락 풍자시다.
올해 8월 22일은 덩샤오핑 탄신 110주년 기념일이다. 중공 관영방송은 8월 8일부터 40회 텔레비전 연속 드라마 ‘역사 전환 중의 덩샤오핑’ 방송을 시작했고, 8월 19일 신화사는 또 장편 기사 ‘개혁 개방의 위대한 기치를 더욱 높이 추켜들자’를 발표하여 처음으로 덩샤오핑과 시진핑 두 사람을 함께 언급했다. 같은 날 인민일보 평론부도 ‘개혁하지 않으면 죽는 길밖에 없다’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했다. 더욱 특이한 것은, 중공 중앙에서 덩샤오핑 탄신 110주년을 기념하는 좌담회를 가진 8월 20일, 잡지 ‘환구인물’에 또 ‘덩샤오핑 주룽지를 평가: 1인자는 해도 2인자는 못 한다.’는 문장을 실었다.
만약 여러분께서 머리가 가물거리지 않는다면, 현재 시진핑의 호랑이 사냥 과정을 염두에 두고 차근차근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덩샤오핑을 기념한다는 일체의 행위는 종규(鍾馗)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는 행위나 다를 바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종규 : 작은 귀신을 잡아먹는 큰 귀신. 당 현종의 꿈에 나타남.)
어쨌든 첫째로, 드라마 ‘역사 전환 중의 덩샤오핑’은 4인방(四人幫)이 10월 10일 상하이에서 무장 폭동을 발동해 정권을 찬탈하려 시도한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는 신4인방(장쩌민의 4대 기둥 저우융캉, 쩡칭훙, 쉬차우허우, 보시라이)도 정변으로 시진핑을 하야시키고 보시라이를 앉히려 시도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드라마는 ‘4인방 분쇄’가 마오쩌둥 생전의 배치라는데, 이는 후진타오부터 시진핑에게 연결된 ‘신4인방’ 처리의 의미를 드높이는 연상 효과가 있다. 4인방 폭동은 문화대혁명의 대범죄가 폭로될까 두려워서 벌어졌고, 신4인방의 정변은 파룬궁 탄압의 대죄악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계획되었다.
다음으로 신화사와 인민일보 두 편 문장은 덩샤오핑이 남방 시찰의 이면적 이유를 암시한 말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리고 드라마는 장쩌민이 (상하이에) 취임한 후 극좌 노선을 추진하면서 개혁을 반대하여, 11대 3중 전회에서 덩샤오핑이 확립한 개혁개방 노선이 전례 없는 장애에 부딪혀 정체상태가 된 과정을 보여주었다. 88세 고령인 덩샤오핑은 부득불 당년 마오쩌둥이 남방 시찰로 린뱌오를 도망치게 만든 것을 모방하여 ‘남순’ 강연(南巡講話)을 수단으로 장쩌민에게 하야 압력을 넣었다.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1일까지 덩샤오핑의 우창, 선전, 주하이, 상하이 시찰을 ‘덩샤오핑 남순(南巡)’이라 부른다.
1월 17일, 덩샤오핑 일가족 17명은 양상쿤의 수행 하에 베이징을 출발했다. 1월 18일 오전, 덩의 전용열차가 그의 남방 시찰 첫 역인 중국 중부의 요지- 우한에 도착했다. 우창 기차역에서 덩샤오핑은 그를 마중 나온 당시 후베이성위 서기 관광푸(關廣富), 성장 궈수옌(郭樹言)과 서기 첸윈루(錢運錄)에게 한바탕 화를 낸 후, “개혁하지 않는 자는 낙마시키겠다.”고 이번 행차의 진정한 목적을 말하면서 그들에게 이 말을 글자 그대로 베이징에 전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덩샤오핑이 남순 당시, 우창역에서 장쩌민을 낙마시키겠다고 말하는 사진이다.(인터넷사진)
난창에서, 덩샤오핑은 장시성위 서기 마오즈융에게 말했다. “개혁 개방을 하지 않는 자는 낙마해야 한다. 당신은 나의 이 말을 베이징에 보고해도 된다.”
선전에 도착한 후, 덩샤오핑은 또 반복했다: “내가 오늘 말한 것을 당신은 아래에 전달해도 되고 위인 베이징에 전해도 된다. 나는 후베이와 장시에서도 말했는데 개혁 개방을 하지 않는 사람은 낙마해야 한다!“
주하이에서도, 덩샤오핑은 회의를 열고 그가 우한 등지에서 한 말을 또 반복했다. “개혁하지 않는 사람은 낙마한다,” 회의는 치오스(喬石)가 주최했고 회의에 출석한 이들로는 또 국가 주석 겸 군사위 부주석 양상쿤과 군사위 부주석 류화칭, 그리고 양상쿤의 남동생, 해방군 총 정치부 주임 겸 군사위 비서장 양바이빙(楊白冰)이었다. 양바이빙 역시 덩샤오핑의 남방시찰 후 장쩌민에게 군부를 대표하여 직접 외쳤다. “개혁개방을 보호하고 배려할 것이다.” 이 역시 장쩌민이 양씨 형제를 뼈에 사무치게 미워하며 훗날 박해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다.
속담에 일은 세 번을 넘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덩샤오핑은 연속 4번이나 장쩌민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진퇴양난에 처한 덩샤오핑은 당시 귀신에 홀린 듯이 덕도 없고 재능도 없는 면종복배의 소인배 장쩌민을 등용하여 일을 그르치게 한 것에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다음으로, 잡지 ‘환구인물’이 발표한 기사 “덩샤오핑의 주룽지 평가”도 장쩌민을 두렵게 한 크나큰 비사 하나를 폭로했다. 이것은 중공에 의해 20여 년 동안 묻혀있던 비사다.
1990년대 초반, 중국 정치에 아주 큰 형세변화가 발생했다.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전근된 주룽지는 국내외 언론에 중국 정계의 ‘흑마(다크호스)’로 칭송되었고 그의 ‘백락’(인재를 잘 알아보고 등용하는 사람)은 바로 덩샤오핑이었다. 1991년 설 후 덩샤오핑은 주룽지를 베이징에 전근시킬 타산을 했다. 그러나 주룽지의 독립적 사고방식, 바른말을 참지 않는 성격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그를 다 좋아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 덩샤오핑은 한마디 말로 응수했다. “주룽지는 1인자는 해도 2인자는 못한다.” 다음 해 5월, 덩샤오핑은 수도강철공사를 시찰할 때 “나는 경제를 모르지만 알아들을 수는 있다. 우리는 간부를 선발해 경제를 배워야 한다. 주룽지가 경제를 안다.”고 말했다.
1991년 초반, 개혁 개방이 정체 상태에 빠졌을 때, 중공 상해시위 기관보 ‘해방일보’에 연재되는 ‘황푸핑’이라는 제목의 평론 시리즈가 ‘개혁을 추진하고 시장 경제를 실행할 것’을 주장했다. 이 평론의 주요 작자는 저우루이진(周瑞金)이고 그 지지자가 바로 주룽지였다.
이 평론은, 원래 덩샤오핑의 남방 시찰 목적은 장쩌민을 핍박해 낙마시키고 경제를 아는 주룽지를 계승하게 하려는데 있었음을 암시했다. 바로 이러했기에 흉금이 좁고 질투심이 지극히 강한 ‘쪽발이 여인’ 장쩌민은 줄곧 ‘1인자는 해도 2인자는 못 한다’는 주룽지에 대해 마음속에 항상 반감을 품고 곳곳에서 주룽지를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다. 당년 장쩌민이 6명 정치국 상무위원의 일치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룬궁 탄압을 고집한 것 역시 주룽지, 리루이환, 치오스 등을 낙마시켜 자신의 절대 권위를 수립하기 위해서였다. 그 3인은 일관되게 파룬궁을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다시 시진핑의 최근의 ‘호랑이 사냥’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이 역시 장파로부터 극대의 도전을 받았다. 지금 저우융캉과 쉬차이허우 등 대호들이 낙마한 후, 장쩌민은 날마다 커져가는 초조와 불안 속에서 지내고 있다.
해외 언론의 보도를 따르면, 시진핑, 왕치산의 반부패 연합에 대해 장파는 크게 불만을 표하면서 장쩌민에게 직접 나서서 왕치산에게 제동을 걸라고 부탁했다. 이유인 즉 시, 왕의 반부패는 “이미 우리 당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했고 어렵게 얻은 안정과 조화를 심각하게 파괴했으며, 적대 세력에게 틈탈 기회를 주어 우리의 정권이 전례 없는 위기에 처하게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연명으로 중앙에 편지를 써 왕치산을 즉각 사직시키라고 했다.
장쩌민의 발작적인 반격에 직면하여 7월 초, 신비하게 ‘실종’ 된지 여러 날이던 왕치산은 내몽고에 등장해 반부패를 강조했다. 이때 그는 표정이 엄숙했고, 책상을 두드리면서 신랄한 말을 여러 번 했다. 왕치산의 이번 강연은 적어도 ‘세 가지 신호’를 보냈다고 당시 한 평론은 분석했다.
그 세 가지 신호는 첫째, ‘순시’를 통해 ‘호랑이 사냥과 파리 잡이’를 강화할 것이며, 둘째, 부패척결에 금지구역이나 예외가 없이 ‘누가 연루되든 끝까지 조사할 것이며 절대로 아쉬워하거나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이로 인해 장차 더욱 많은 ‘호랑이’가 드러날 것이다. 셋째, 눈앞의 ‘부패척결 투쟁 형세는 여전히 엄중하고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7월 29일, 저우융캉 입안심사를 정식 선포한 그 날, 중공 언론 ‘인민망’은 “저우융캉 ‘대호’를 잡은 것은 부패척결의 끝이 아니다.”란 평론을 발표했다. 이 문장이 몇 시간 후 삭제당하긴 했지만, 이 평론의 제목은 시진핑의 7월 26일 정치국 회의 강연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시진핑이 또 정치국 회의에서 한 다른 말도 전해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우리를 두고 보자고 위협하는데 나는 그들에게 알려 준다, 누가 누구를 두려워하는가! 당년에 주룽지는 관 100개를 준비해 두었다가 99개는 부패분자에게 주고 마지막 한 개는 자신에게 남긴다고 말했다……”
8월 4일 지린성 장백산 당보 ‘장백산 일보’에 또 중공 총서기 시진핑의 “부패와의 투쟁에서 개인의 생사, 개인의 명예훼손을 개의치 않는다.”란 발언이 보도되었다. 이 의미심장한 말은 각 대형 매체에 연달아 전재되었지만, 얼마 안 돼 마찬가지로 삭제당하고 모든 관련 보도 역시 동시에 봉쇄당했다.
“하늘의 그물은 너무도 넓어, 느슨하긴 하지만 빠뜨리는 것이 없다.”
한 때 우쭐거리던 신4인방도 최후에는 마찬가지로 역사의 대심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인터넷사진)
여러 가지 현상을 종합하면, 덩의 개혁개방이 장파 보수세력으로부터 거대한 장애와 위협을 받은 것처럼, 시의 부패척결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시진핑 본인의 생사마저도 아슬아슬한 고험을 몇 차례 받았다. 상술한 최근 보도들은 장쩌민에 대한 시진핑의 엄중 경고로 볼 수도 있다. 국제사회는 이를 시진핑 칼날이 ‘노호’ 장쩌민을 겨누고 있다는 명확한 신호로 여긴다.
근일 들어, 시진핑 당국에서 덩샤오핑을 요란스레 기념하여 사람들에게 주려는 암시는 이렇다. : “장쩌민 체포야말로 덩샤오핑의 생전 소원을 이루는 것이며 또한 후진타오가 이임할 때의 중대한 배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