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ntdtv.co.kr 2014-07-22 11:58 AM]
중공은 18대에 들어선 후 35명의 고관이 낙마했다. 그들 다수는 장파 인물들이다. 국제사회가 장파의 거두인 전 중공 정법서기 저우융캉 입건 소식이 발표되기를 기다리면서, 이 안건을 어떤 범죄로 규정하겠는지에 촉각을 모으는 중, 중공 군사위 부서기 쉬차이허우가 그물에 걸려들었다. 국외에서는 저우융캉 조사가 장쩌민의 극력적인 방해로 성사되지 못하자 시진핑이 홧김에 쉬차이허우에게 일격을 먹였다는 소식도 있다.
중공의 반부패 폭풍은 중공의 군사위, 중기위, 정법위 등 각계에 미쳐, 중공 18대 후 낙마한 고관 수는 이미 35명이다. 그러나 수천 명에 연루된 저우융캉 안건의 성질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이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6월 30일, 중공 군부에서 인사 대권을 장악한 지 10년이나 되는 쉬차이허우가 당적을 취소당해 국내외 시선을 끌었다. 저우융캉에 대한 시진핑의 조사는 쉬차이허우보다 2년 앞서 2012년 리춘청의 낙마로부터 시작했고, 저우융캉의 패거리는 하나하나 그물에 걸려들었다, 여론은 왜 먼저 낙마한 것이 중공 전 정치국 상무위원 저우융캉이 아니고 쉬차이허우였을까 에 질문을 던졌다.
‘신기원주간‘은 최신 베이징 소식통을 인용해, 금년 ’7.1’ 전야에 시진핑 앞에 놓인 제물들은, 퇴직한 죽은 호랑이 쉬차이허우, 반 시체인 호랑이 저우융캉, 연금된 호랑이 쩡칭훙, 그리고 그들 배후의 최대 호랑이 장쩌민 등 네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쩌민의 방해로 저우호랑이를 단번에 때려죽일 수 없게 된 시진핑은 “홧김에 쉬차이허우를 일격에 쓰러뜨렸다.”
쉬차이허우가 낙마 되자 장쩌민은 약이 오르고 당황했다. 쩡칭훙도 연금당했기 때문에 장쩌민을 대신해 앞에서 말해 줄 사람이 없게 됐다. 그래서 장쩌민은 전용 열차를 타고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다급히 달려갔다.
7월 2일, 베이징에 도착한 장쩌민은 시진핑 면회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7월 3일, 시진핑은 한국을 방문함으로써 장쩌민이 헛걸음치게 했다. 이는 공식적인 첫 한국 방문이었다.
중국 언론 쉬차이허우의 막후 조종자를 추적
쉬차이허우 낙마 후, 중국 언론은 분분히 그 막후 지휘자 장쩌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7월 2일, 중공 대변언론 ‘신화망’의 유명한 블로거가 “프랑스 검찰기관은 어떻게 감히 전임 대통령을 조사할 수 있었는가?”란 제목의 글을 올려 질문을 던졌다. 쉬차이허우 낙마 배후에 “더욱 큰 탐관이 또 있는 게 아닌가?” “이런 탐관들을 누가 배양했는가, 애초 그들을 발탁한 것은 목적을 지닌 고의인가 아니면 개인 불찰인가?”
문장은, 반부패 문제에서, 중공 당국은 예컨대 사르코지급의 ‘대호’를 조사하는 것과 같은 기개가 있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재신망’은 평론에서, ‘쉬차이허우 낙마는 보시라이 뒤를 이은 또 하나의 본보기적 반부패 사례’라고 하면서, 보시라이의 낙마는 “그의 중국의 정치 규칙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쉬차이허우 역시 정변 밀모에 연루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고 했다.
예젠잉(葉劍英)의 양녀 다이칭(戴晴)이 ‘미국의 소리‘ 를 통해, 쉬차이허우 등 대 탐관이 군대에서 악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주요 배경은 장쩌민이라고 국제사회에 알렸다. “세력이 강한 그들의 배후 권력자가 실제 원흉이라 한다면, 원흉은 바로 장쩌민입니다.”고 했다.
쉬차이허우는 장쩌민이 발탁한 군부 대리인일 뿐만 아니라 장쩌민이 ‘군에서 가장 총애하는 사람’이라 불린다. 동시에 또 장쩌민 파벌이 보, 저우 정변을 획책할 때에도 군부 최대 지원세력이었다고 한다.
2002년~2004년까지, 쉬차이허우는 총 정치부 주임을 역임했고, 2004년~2013년 3월까지, 중공 군사위 주석을 담임했다. 2004년 장쩌민이 억지로 군권을 내놓은 후에도 그의 군부 측근 쉬차이허우와 궈버슝은 군사위 부주석으로서 당시 군사위 주석 후진타오를 배척했다.
현재, 장파 두 번째 인물 쩡칭훙도 잡혔다고 하며, 장쩌민의 추문도 집중적으로 폭로 되었다. 근간에 시진핑의 ‘호랑이 사냥’은 속도를 가하여 최종의 ‘노호’ 장쩌민에게로 곧장 접근해 가고 있다.
NTD뉴스 리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