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리쥔 탈출 후 긴박했던 24시간, 무슨 일 있었나?(한,중)

[www.ntdtv.co.kr 2013-08-02 11:26 AM]

중국 정계에 파문을 일으킨 보시라이(薄熙來) 전 충칭 서기의 재판에 즈음해, 한 네티즌이 보시라이의 수하였던 왕리쥔(王立軍)이 미국 영사관으로 탈출했을 때 중국공산당 고위층이 24시간 동안 어떤 일을 벌였었는지 인터넷에 구체적으로 폭로해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이 네티즌은 ‘캉사부[康師傅-중국의 라면 브랜드로 저우융캉(周永康)을 지칭]’, ‘스언(施恩-중국의 분유 브랜드로 ‘법망을 벗어나도록 은혜를 받다(法外施恩)’는 의미로 쓰임]’ 등의 은어를 사용해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기자가 이를 새롭게 정리했습니다. 전체 사건은 크게 보면 후진타오와 저우융캉 두 진영의 대립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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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6일, 왕리쥔이 청두(成都) 주재 미국 영사관에 진입한 후, 영사관 내부의 중국측 직원으로 가장한 국가안전부 스파이는 즉각 쓰촨 당국에 사건을 보고했습니다. 쓰촨 국가안전부는 베이징 고위층에 소식을 전달했고, 곧 정법위(정치법률위원회) 서기인 저우융캉의 귀에까지 소식이 전달됐습니다. 저우융캉은 즉시 충칭시 서기 보시라이에게 전화를 걸어 일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왕리쥔을 제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보시라이는 황치판(黃奇帆) 충칭시장에게 경찰을 거느리고 청두에 가서 왕리쥔을 체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출발 전 황치판은 왕리쥔과 전화로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고 왕리쥔에게 즉시 미국 영사관에서 나오도록 권유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결국 황치판은 경찰차 70대를 거느리고 미국 영사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에 들어가도록 준비해준 사람은 쓰촨성 공안청의 한 부청장입니다. 당시 이 부청장은 영사관 밖에서 왕리쥔을 기다렸으나 그가 오래도록 나오지 않고 핸드폰 연락도 끊어지자 사태가 발생한 것을 깨닫고, 즉시 쓰촨성 서기 류치바오(劉奇?)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류치바오는 즉각 베이징에 보고했고 후진타오는 류치바오에게 청두 경찰로 영사관을 포위해 왕리쥔의 도주를 막으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시 황치판 쪽을 살펴 봅시다. 황치판의 대군은 도로에서 청두 경찰에게 저지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쳐들어갔습니다. 청두 경찰은 즉시 류치바오에게 보고했습니다. 류치바오는 청두 경찰에게 시내 안에서 그들을 차단하라고 명령했으며 다시 후진타오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미국 영사관과 다섯 블럭을 사이에 두고 청두 경찰은 마침내 충칭 경찰을 가로막는데 성공했고 쌍방은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미국영사관은 상황이 심각함을 깨닫고 해병대에게 탄알을 장전한 채 관내에 내부 방어선을 쌓아놓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습니다.

이후 왕리쥔이 청두 당국의 호송을 받으며 영사관을 떠나자 황치판은 왕리쥔을 빼앗으려 국가안전부 부부장 츄진(邱進)과 논쟁을 벌였고, 각자 자신의 배후 조종자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우융캉은 보시라이에게 전화로 충칭 경찰을 철수시키라고 명령했으나 보시라이는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저우융캉은 후진타오에게 통보했고 후진타오가 직접 보시라이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사건은 독립적인 사건이므로 타인에게 영향이 없다”고 담보한 뒤에야 보사라이는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후 보시라이의 부정부패가 폭로됐습니다. 이 사건은 최고검찰원 반부패국(反貪局)의 지휘 하에 베이징 고등검찰원이 도맡아 처리했으며, 여러 성(省)과 부서에서 선발된 인원으로 특별 조사팀이 구성됐습니다. 그러나 이 조사팀은 고위 당국에 의해 두 번이나 해산됐습니다. 그중 한 번은 조사팀이 홍콩 마카오의 염정공서(廉政公署, ICAC-반부패 조사기구)에 가서 증거를 수집한 후 해산됐습니다. 당시 홍콩 언론은 조사팀이 마카오에서 보시라이의 돈세탁 증거를 수집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재경(財經)’ 잡지에 보도된 보시라이 사건의 세부적인 내용도 삭제를 강요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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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대체적인 사건의 경과입니다. 이 과정을 보면 보시라이와 저우융캉이 은밀한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심지어 왕리쥔마저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왕리쥔은 저우융캉을 잘못 믿고 미국 영사관에서 걸어나왔던 것입니다. 보시라이와 저우융캉은 후진타오 앞에서 동시에 연기를 벌이면서 오히려 후진타오가 보시라이를 보호하도록 했습니다. 보시라이 재판 전에 이런 구체적인 사실이 폭로된 것은 중국공산당 내에서 보시라이를 가볍게 처벌하고 저우융캉을 풀어주려는데 대한 불만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정변을 음모한 이들 두 인물이 모두 처벌 받지 않는다면 중국공산당 내의 가장 완고한 사람일지라도 당의 권위가 이미 땅에 떨어져 해체가 임박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