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시위대 모인 홍콩, 억눌러온 ‘반중국 민심’ 폭발

9일 홍콩 시민단체와 야당이 벌인 ‘범죄인 인도 법안’ 반대 시위에 100만 명 넘는 인파가 모인 것은 그동안 쌓인 홍콩인들의 중국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게 한다.

당초 50만 명의 시위 참가 인원을 목표로 했던 주최 측도 예상보다 훨씬 뜨거운 참여 열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분위기이다.

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표면상의 이유는 홍콩 정부가 추진하는 범죄인 인도 법안 때문이다.

홍콩 정부는 중국을 포함해 대만, 마카오 등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국가나 지역에도 사안별로 범죄인들을 인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범죄인 인도 법안의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홍콩 야당과 시민단체는 중국 정부가 반체제 인사나 인권운동가를 중국 본토로 송환하는 데 이 법을 악용할 수 있다면서 범죄인 인도 법안이 홍콩의 민주주의와 법치를 침해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중국 송환 반대’ 손팻말 들고 거리 나선 홍콩 시민들 /연합뉴스

전날 시위에 참여한 홍콩인마다 손에 든 것은 중국 송환 반대를 뜻하는 ‘반송중'(反送中), ‘악법 반대’ 등의 손팻말이었다.

홍콩 대학생인 앤서니(22)는 “범죄인 인도 법안이 통과된다면 홍콩의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는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라며 “이러한 집회에 참여해 반중국 의사를 표현하는 것마저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인들의 결의를 더욱 굳건하게 만든 것은 그동안 ‘홍콩의 중국화’를 밀어붙인 중국 중앙정부에 대한 반감이라고 할 수 있다.

2014년 홍콩 도심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주화 요구 시위인 ‘우산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중국 정부는 홍콩 독립 목소리가 커질 것을 우려해 강경 일변도의 대홍콩 정책을 줄기차게 밀어붙였다.

우산 혁명을 이끌었던 지도부에는 공공소란죄 등의 명목으로 징역형이 선고됐고, 홍콩 독립을 주장하는 홍콩민족당은 강제로 해산됐다. 정치적 이유로 정당이 해산되기는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 이후 처음이다.

RINGO CHIU/AFP/Getty Images

중국 국가가 연주될 때 모욕적인 행동을 하거나 풍자나 조롱의 목적으로 노랫말을 바꿔 부르는 행위 등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실형 등에 처할 수 있는 ‘국가법(國歌法)’마저 추진됐다.

나아가 홍콩 선거관리위원회는 독립 성향을 가진 야당 후보의 피선거권을 잇달아 박탈하기도 했다.

차이야오창(蔡耀昌)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 부주석은 “중국 중앙정부는 홍콩의 민주주의를 억누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려온 홍콩인으로서 이는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정치적 측면 이외에 사회적, 경제적 측면에서도 홍콩인들의 ‘반중국 분노’는 쌓여왔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홍콩인들을 분노하게 하는 것은 홍콩으로 본토인들이 밀려오고 홍콩을 ‘재산 도피처’로 인식하는 중국 부자들의 ‘검은돈’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천정부지로 뛰어오른 홍콩의 집값이다.

‘범죄인 중국 송환 반대’를 위해 거리를 가득 메운 홍콩 시민들 /연합뉴스

홍콩의 주택가격은 1997년 홍콩 주권반환 이후 중국 본토의 막대한 자금이 홍콩에 유입되면서 2003년 이후 400% 넘게 상승했다. 그 결과 아파트 가격이 3.3㎡(평)당 1억원을 훌쩍 넘어섰다.

홍콩인의 월급 중간값은 약 240만 원에 불과하지만, 20평짜리 아파트가 20억원을 넘어서니 홍콩의 젊은이들은 집을 살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에 ‘나노 플랫'(nano flat), ‘캡슐 홈'(capsule home), ‘구두 상자 집'(shoe box home) 등으로 불리는 초미니 아파트가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해 카오룽 반도 삼서이보 지역에서 분양한 아파트 중 가장 작은 평형은 면적이 123제곱피트(3.4평)에 지나지 않았다.

한 시중은행 홍콩 지점장은 “10년 전에도 홍콩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당시만 해도 집값이 이렇게까지 비싸지 않았다”며 “젊은 홍콩 직원들과 얘기해 보면 집 사는 것을 아예 포기한 직원들이 대부분이어서 놀란다”고 전했다.

홍콩인들의 분노를 유발하는 것은 일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본토인과의 ‘보이지 않는 전쟁’도 있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1997년 이후 홍콩에서 영주권을 얻은 중국인은 70만 명에 육박한다. 홍콩의 현재 인구가 740여만 명이므로, 홍콩 인구의 거의 10%가 본토 출신 중국인으로 채워졌다는 얘기다.

이들 본토인의 상당수가 식당이나 건설 현장 등 저임금 일자리로 몰려든 결과 홍콩 서민들의 임금 수준은 좀처럼 오를 줄을 모른다.

홍콩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5만6천 달러에 달하지만, 시간당 최저임금은 34.5홍콩달러(약 5천200원)에 불과할 정도로 낮다.

RINGO CHIU/AFP/Getty Images

1인당 GDP 3만 달러 시대에 진입한 우리나라의 올해 최저임금이 8천350원이라는 것에 비춰보면 홍콩 서민들의 임금 수준이 얼마나 낮은지 알 수 있다.

더구나 중국 본토인의 상당수는 대학을 나오고 유학까지 다녀온 고급 인력이기 때문에 이들은 고임금 일자리마저도 잠식한다. ‘관시'(關係)로 불리는 연줄이 좋은 이들은 중국과 관련된 일의 상당 부분을 독식한다.

홍콩의 투자회사에서 일하는 김 모(43) 씨는 “실력도 별로 좋지 않은 본토 출신이 회사 내 고위직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핵심 요직을 차지한 본토 출신 밑에서 일해야 하는 홍콩 출신은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분노’가 최근 수년 동안 축적되고 고조한 결과, 전날 범죄인 인도 반대 시위에 100만 명이 넘는 홍콩인들이 참여하도록 하는 근본적인 동력이 됐다고 할 수 있다.

홍콩 법무법인 ‘리버티 체임버’의 박완기 법정 변호사는 “홍콩의 사회적, 경제적 문제가 본토인 때문에 비롯됐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홍콩인들은 많은 문제의 원인을 본토인으로 돌리고 있다”며 “이러한 감정적 분노 때문에 앞으로 더욱 큰 갈등과 충돌이 일어날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