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때도 중립 지켰던 軍, 시위 군중 무자비하게 진압
서면 명령 없이 ‘구두 지시’로 진압 이뤄져 정당성도 의문
톈안먼(天安門) 민주화 시위가 30주년을 맞은 가운데 시위진압에 동원됐던 인민해방군도 당시 사태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고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4일 보도했다.
톈안먼 사태는 1989년 6월 4일 민주화와 정치개혁을 요구하면서 베이징 톈안먼 광장에서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과 시민들을 중국 정부가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해 무자비하게 유혈 진압한 사건을 이른다.
SCMP에 따르면 인민해방군은 중국 현대사 최대의 정치적 동란으로 여겨지는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대혁명 때도 정치적 중립을 지켰으며,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중국이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던 인민해방군이 톈안먼 시위진압에 동원되면서 이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됐다.
인민해방군 군사과학연구원에서 근무했던 한 연구자는 “인민해방군의 누구도 시위진압에 나선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못할 것”이라며 “대신 그들은 깊은 수치심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톈안먼 사태는 언젠가는 재평가될 것”이라며 “궁극적인 책임은 (진압) 결정을 직접 실행한 군 지휘부에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톈안먼 시위진압의 정당성을 뒤흔드는 것은 진압 명령이 서면 명령이 아닌 ‘구두 지시’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당시 최고 실권자이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었던 덩샤오핑(鄧小平)의 구두 지시를 받아 강경파였던 양상쿤(楊尙昆) 중앙군사위 부주석이 전면에 나서 군을 동원해 시위대를 유혈 진압한 것으로 전해졌다.
쉬친셴(徐勤先) 전 인민해방군 38군 사령관은 당시 강제진압 명령을 거부해 5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베이징시는 톈안먼 사태로 시민 218명, 군경 23명 등 241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지만, 여기에 대한 이견도 많다.
지난 2017년 홍콩 인터넷매체 ‘홍콩01’은 영국 정부가 기밀 해제한 톈안먼 사태 관련 외교문서를 입수해 당시 총에 맞아 사망한 학생, 시민, 군인이 1만 명을 넘는다는 중국 국무원 소식통의 전언을 보도하기도 했다.
더구나 자오쯔양(趙紫陽) 당 총서기는 군을 동원한 무력진압에 공개적으로 반대해 톈안먼 시위진압은 ‘당이 군을 영도한다’는 원칙에도 어긋난다는 지적을 받는다.
톈안먼 시위진압에 동원된 군대의 규모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미국 학자 우런화는 20만 명의 군이 동원됐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당시 시위진압에 나선 군은 처음에 공중으로 총을 발사했으나 나중에 시위 군중을 향해 직접 발포했으며, 이로 인해 ‘런민쯔더빙(人民子弟兵·인민의 아들딸로 이뤄진 군대)’의 이미지는 하룻밤 사이에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중국 정부는 당초 톈안먼 시위를 ‘반혁명 폭란’으로 규정했으나, 2000년 장쩌민(江澤民) 당시 주석이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적 풍파’라는 표현을 사용한 후 관영 매체는 이 표현을 널리 사용했다.
‘정치적 풍파’라는 표현을 먼저 제안한 것은 군부이며, 1997년 발간한 중국군 백서에서 ‘정치적 풍파’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했다고 전직 인민해방군 장교들은 전했다.
이는 톈안먼 시위진압에 동원됐던 인민해방군이 지니고 있던 죄책감과 수치심의 반영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후 군과 당을 완전히 분리하자는 주장도 나왔으나, 2007년 이러한 주장은 완전히 부정되고 인민해방군에 대한 당의 영도는 확고해졌다.
웨이펑허(魏鳳和) 중국 국무위원 겸 국방부 부장은 지난 2일 싱가포르 샹그릴라호텔에서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일명 샹그릴라 대화)에서 “톈안먼 시위는 중앙 정부가 진압할 필요가 있던 정치적 소요사태였고, 진압은 옳은 방침이었다”며 시위진압을 옹호하기도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