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염황춘추 사건, 중공 체제 내 개혁 한계 노출

【微视频】改良梦醒了吗? 《炎黄春秋》被占领

 

[자오페이]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이 학교를 점령하고 군대가 정부를 인수한 이야기를 들으면 나이 많은 분들은 아직도 몸서리를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공은 4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그 악습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개혁파 잡지 ‘염황춘추(炎黄春秋)’ 본사를 중공이 점령한 것입니다. ‘염황춘추’는 제도권 내에서 개혁을 하려는 자유파 세력의 잡지입니다. 당연히 개혁을 호소하고 일부 왜곡된 역사를 원상회복하려 노력을 기울이기에 당 내 극좌세력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염황춘추’의 사장 겸 총편집은 두다오정(杜导正)이었고 부사장은 후더화(胡德华,후야오방胡耀邦의 아들), 총편집은 쉬칭취안(徐庆全)이었습니다. 7월 14일, 중국예술연구원은 ‘염황춘추’의 두다오정, 후더화, 쉬칭취안 등을 교체한다고 통지했습니다. 그러자 ‘염황춘추’는 성명을 발표하여 중국예술연구원은 계약에 따라 ‘염황춘추’잡지사가 보유한 인사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음 날인 7월 15일, 중국예술연구원은 사람을 파견하여 잡지사를 점령했습니다. 이것은 홍위병이 소란을 피운 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7월 17일, 집행주편 우웨이(吴伟)는 잡지사 사장, 법인대표 두다오정이 서명한 ‘정간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잡지의 성향이 바뀌느니 차라리 정간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7월 26일, 후더화가 재무제표를 작성하려 잡지사에 들어가려 하자 예술연구원의 사람들이 문밖에서 가로막았습니다. 후더화는 잡지사가 국영기업도 아니고 당의 재산도 아닌 민영기업임을 강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7월 28일, ‘염황춘추’사는 중국 예술연구원을 고소했지만 차오양(朝阳)구 법원은 고소장을 접수하지 않아 이 사건은 교착상태에 들어갔습니다. 백주 대낮에 깡패 같은 이들이 잡지사를 점령한 이 사건은 바로 문화대혁명시기 중공이 하던 행위입니다. 이 사건은 중공이 문화대혁명이 끝난 40년 후에도 여전히 그런 식의 처방을 사용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날 중공은 해체의 전야에 처해있는데 이는 전 소련의 28대 당대회 시기와 같습니다. 그것은 1990년 7월의 일인데 그때 소련공산당(‘소공’)은 오늘의 중공과 같았습니다. 추악한 일처리와 악행에 대해 이미 서민들은 권태를 느끼고 있었고 소공내부는 논쟁이 끊이질 않아 각파는 모두 출로를 찾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순수한 마르크스주의를 하자고 하고, 어떤 사람은 계속 개혁을 하자고 하고, 어떤 사람은 레닌주의를 하자고 합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파벌은 바로 옐친파인데 그들은 공산주의 노선을 철저히 폐지하고 공산당을 ‘사회민주당’으로 개명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소공 총서기 고르바초프는 우유부단하게 계속 소공을 유지하려 들었고 옐친은 분노하여 탈당했습니다.

 

중국공산당 해체의 운명이 가까워진 지금, 중공체제내의 각파도 의견 충돌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공의 이런 의견 충돌은 공개될 수 없기에, ‘염황춘추’사건과 비슷한 이런 정치사건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일반적 역사해석과는 다릅니다. 중공의 학자는 28대가 소련공산당 운명의 관건적인 대회라고 봅니다. 이것은 틀린 견해입니다. 소공해체의 운명은 공산당이 일어선 그 날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소공 28대 대회는 다만 각각의 사람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 것이고, 탈당하지 않은 사람은 공산당을 따라 몰락했습니다. 하늘은 소련공산당을 해체할 영웅을 찾다가 바로 옐친을 선택했습니다. 1991년 소련군 일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유지하려 했지만, 러시아 총통 옐친은 거리에 나서 쿠데타 반대 시위를 일으켜 쿠데타를 종식시켰습니다.

 

‘염황춘추’사건도 하늘이 체제 내 개혁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체제 내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중공의 본질은 사악하여 영락없이 해체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심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옐친을 본받아 중공에서 탈퇴하여 미래 중국의 영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