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분석] 시진핑, 개혁 최대 걸림돌 쩡칭훙과 갈등 관계

쩡칭훙은 장쩌민 집단의 2인자로 군림하며 그의 영향력과 권력을 키워왔다. 장쩌민파 주요 인물로 보시라이(薄熙来), 저우융캉(周永康), 쉬차이허우(徐才厚), 궈보슝(郭伯雄) 등이 있지만 모두 쩡칭훙을 넘어설 만큼의 세를 확장하지는 못했다. 이는 시진핑 세력이 집권 후 5년 동안 장쩌민 세력과 벌인 치열한 정치싸움이 결국 쩡칭훙과의 실력 대결로 귀결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장쩌민파의 정변에 맞선 반부패 ‘호랑이 사냥’의 로드맵에는 보시라이, 저우융캉, 쩡칭훙, 장쩌민 등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시진핑 당국이 저우융캉의 실각을 발표한 2014년 7월 29일 이래 3년 반이 지났지만 쩡칭훙에 대한 조사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시진핑 당국과 장파의 치열한 투쟁은 19차 당대회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쩡칭훙이 시진핑 당국의 반부패 운동을 흔드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시진핑과 쩡칭훙 관계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인가?

시진핑이 후계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정

쩡칭훙은 ‘대내총관’과 서기처 서기 겸 중앙조직부장의 신분으로 13여 년 동안 장쩌민을 보좌했다. 장쩌민이 총서기 자리를 내려놓고 중앙군사위원회주석을 맡은 2년까지 포함한다면 쩡칭훙이 중난하이에서 장쩌민을 보좌한 기간은 무려 15년에 달한다.

2007년 중국 공산당 17기 1중전회에서 시진핑은 중앙위원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수직 승진했다. 이를 계기로 시진핑은 후진타오(胡锦涛)의 후계자로 점쳐졌던 리커창(李克强)을 제치고 주류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됐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쩡칭훙이 시진핑을 후계자로 추천했다고 전해진다.

장쩌민을 분석한 책인 <진짜 장쩌민(真實的江澤民)>은 쩡칭훙의 이러한 행보가 그저 장파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고 지적했다. 시진핑을 후계자로 지목해 2007년 후진타오의 후계자인 리커창의 취임을 저지하고 2007~2012년 동안 자신들의 후계자인 보시라이를 성장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명성과 권력을 획득한 보시라이를 앞세워 2012년 중국 공산당 18대에서 최소 상무위원과 중앙정법위원회 서기직 중 하나를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일찍이 지목해 둔 후계자인 천량위(陈良宇)가 실각하고, 다음 후보인 보시라이마저 당내 득표수 미달로 불확실성은 높아져만 갔다. 장쩌민은 어쩔 수 없이 시진핑을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장쩌민이 시진핑을 최종적으로 신임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시진핑이 파룬궁 박해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쩌민과 쩡칭훙은 당시 충칭시 서기인 보시라이가 ‘창훙다헤이(唱红打黑: 홍색 가요 부르기와 부패 척결)’를 통해 얻은 전국적인 통제권을 이용해, 중국 공산당 18차 당대회 이후 2년 뒤에 ‘충칭모델’을 전국으로 확대시킬 계획을 세웠다. 또 보시라이가 장악하고 있는 전국의 정법위원회, 무장경찰부대, 군부 인맥, 장쩌민이 군에서 갖는 실권 등을 통해 시진핑과 그의 세력을 파면하거나 체포해 몰락시킬 준비를 해나갔다. 중국을 다시 그들만의 세상으로 만들려는 생각이었다.

쉬차이허우와 궈보슝이 실각한 뒤 한 언론의 보도에 따르면 쉬차이허우는 여러 사람이 있는 군부 측 반공개 장소에서 궈보슝에게 “(시진핑은) 5년 만 하고 꺼지라고 해!”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는 장쩌민이 정변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대목이다.

쩡칭훙의 정치세력

1989년 6·4 톈안먼(天安門) 사태 당시 장쩌민은 베이징으로 들어가 중공중앙 총서기를 맡았다. 당시 그가 양상쿤(楊尚昆)과 리펑(李鵬)에게 단 한 가지만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쩡칭훙을 중앙판공청 부주임으로 임명하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와 관련해 쩡칭훙 집안의 정치적 자산과 쩡칭훙 본인이 베이징에서 구축한 넓은 인맥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장쩌민이 확고한 권력을 바탕으로 나라와 국민을 해치는 행보는 쩡칭훙으로부터 초래된 바가 적지 않다.

쩡칭훙의 아버지인 쩡산(曾山)은 당의 원로 간부이자 특무기관의 수장을 지냈다. 또한 그는 내무부 부장(장관)을 역임했다. 또 중국 공산당 동남국(東南局), 화중국(華中局) 조직부장을 지냈고 방직부 부장, 상업부 부장, 교통부 부장, 내무부 부장 등을 두루 거쳤다. 이는 시간이 지나 쩡칭훙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으로 탈바꿈했다. 쩡칭훙의 어머니인 덩류진(鄧六金)은 장정(長征)에 참여한 27명의 여성 중 한 명으로, ‘태자당의 요람’으로 불리는 기관보육원의 설립자이자 원장이었다.

아버지의 세력을 이용해 정계에 진출한 이는 쩡칭훙뿐만이 아니다. 그의 가족들 역시 고위직에 진출했다. 둘째 동생인 쩡칭화이(曾慶淮)는 문화부 관리로, 문화 관련 사업 전반을 지휘하며 형을 위해 홍콩 특무와 중국 전역의 예술계를 장악했다. 셋째 동생인 쩡칭양(曾慶洋)은 군사과학원 군제연구부(軍制研究部) 부장이자 소장(少將)이고, 넷째 동생인 쩡칭위안(曾慶源)은 공군 후근부(後勤部) 부장이자 소장이다. 여동생 쩡하이성(曾海生)은 중국인민해방군총참모부(中國人民解放軍總參謀部) 관리보장부(管理保障部) 정치위원이자 소장이다. 조카딸 왕샤오링(王曉玲)은 광저우(廣州)시 부시장 겸 기율위 서기를 지냈는데 각종 범죄사건에 연루돼 여러 차례 실명 신고를 당했다.

쩡칭훙은 군대와 석유사업 부문에서 근무한 바 있으며 후기에는 중앙조직부와 국가안보시스템, 중앙판공청, 공산당 간부학교, 통일전선부 등 핵심부처를 장악했다. 당시 그가 심어놓은 십복들은 당 내부와 각 지방을 비롯해 해외까지 포진돼 있었다.

시진핑 정변, 쩡칭훙이 모의 및 주도

쩡칭훙은 장쩌민 세력의 2인자이자 참모이다. 그의 일가족의 경제적 탐욕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그 역시 정치적 ‘대간(大奸·매우 간사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5년 동안 장쩌민 세력은 암살, 테러사건 조작, ‘구자이(股災·주가 폭락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 조작 등 온갖 수단을 통해 시진핑에 대한 정변을 시도해왔다. 그리고 쩡칭훙은 배후에서 정변을 계획, 조종했다.

2013년부터 중국 대륙에서 많은 테러공격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테러공격의 대다수는 쩡칭훙이 배후에서 계획한 것으로, 이는 기존과는 다른 형태의 정변이었다. 그는 국민들을 무분별하게 살해하고 선동해 시진핑을 강제로 낙마시키려 했다.

2013년 11월 3중전회 전 천안문 폭발사건과 산시성 공산당위원회에서 발생한 연쇄 폭발사건, 그리고 2014년에 벌어진 쿤밍의 유혈충돌은 모두 쩡칭훙이 테러행동의 수위를 올렸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표적 사건이다.

2014년 3월 1일 중국 공산당의 ‘양회’를 앞두고 윈난성 쿤밍시 기차역에서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살인사건이 발생해 32명이 죽고 143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이 사건은 쩡칭훙이 세심하게 계획한 테러였다. 원래 5개 도시에서 동시에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이 사건 이후 나머지 4개 도시에서는 실행되지 않았다. 또 양회 전 <밍빠오(明報)>의 전 총편집장 류진투(劉進图)를 살해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이외에도 쩡칭훙은 수하의 특수요원을 시켜 해외의 중문매체에 ‘시진핑은 내부간첩이다—고비에 다다른 중국’이라는 글을 게재하도록 지시한 바 있었다. 이 글은 중국 공산당 내부의 좌파들이 시진핑을 반대하고 장쩌민 세력의 정변 활동을 지지하도록 선동했다. 그 후에도 해외 매체를 통해 시진핑의 반부패에 대한 장쩌민의 지적을 일일이 소개했고 시진핑은 당내 고위층의 가족에게까지 권력을 휘두르지 말라는 등 터무니없는 내용을 확산시켰다.

2016년 7월과 8월 사이 쩡칭훙은 홍콩에 있는 자신의 대리인 렁춘잉을 시켜 신당인TV의 중국고전무용대회를 방해하고 탄압했다. 이는 홍콩사회의 핵심가치관과 언론의 자유를 파괴했다. 또한 홍콩에서 계속 실시된 장쩌민 세력의 파룬궁 박해 정책은 홍콩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쩡칭훙은 장쩌민 세력의 파룬궁 박해, 시진핑에 대한 정권찬탈을 주도한 배후 조종자이다. 그는 지금까지도 모든 자산과 수단을 동원해 시진핑에 대항하고 있다.

타협할 수 없는 시진핑과 쩡칭훙

정치 싸움은 타협과 거래로 이루어진다. 양측은 타협과 거래를 통해 정치적 이익을 최대화한다. 하지만 시진핑과 쩡칭훙의 갈등은 타협의 여지가 없으며 결국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결말에 이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시진핑은 반부패 운동을 카드로 내세웠지만 쩡칭훙 가족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쩡칭훙의 가족은 장쩌민의 가족 못지않게 탐욕스러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보도에 따르면 쩡칭훙 일가의 자산은 거의 천 억 위안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공권력을 남용해 강제로 국가자원을 분할하는 바람에 산둥루넝(魯能)의 700억 위안이 유실되는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또 다른 문제는 바로 자신의 가족을 위해 돈세탁을 하는 매국 행위에 있다.

그는 후진타오(胡錦濤) 집권 초기 장쩌민 일가와 함께 수중의 권력을 남용해 대만에 대한 ‘타협정책’을 수 년 동안 비밀리에 진행했다. 가족의 돈세탁을 위해 국가의 군사력과 정치세력을 이용한 것이다. 홍콩 언론이 폭로한 바에 따르면 쩡칭훙 일가의 재산은 베이징, 톈진, 산둥, 상하이, 홍콩, 호주 등 각지에 은닉돼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형제와 아들, 며느리, 조카들까지 최소 12명의 가족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데, 국내에 있는 재산만 무려 430억~470억 위안으로 추산된다.

부정부패를 제외하고도 쩡칭훙이 저지른 죄악은 무수히 많다. 파룬궁 박해, 파룬궁 창시자에 대한 수차례 암살시도뿐만 아니라 ‘초한전'(超限戰) 방식으로 시진핑을 겨냥한 정변 모의와 이 과정에서 중국 금융과 경제 파탄까지 일으키기도 했다.

쩡칭훙이 야심을 품고 있는 정치인이라는 것은 공산당 고위층 사이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보도에 따르면 저우융캉은 체포되고 난 뒤 장쩌민의 투병 기간 중에 비밀리에 쩡칭훙을 만나 인사명부 초안을 작성한 사실을 자백했다. 쩡칭훙의 목적은 바로 보시라이가 베이징에 입성해 시진핑을 견제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최고의 위치에서 군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쩡칭훙은 장쩌민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대내외적으로 장쩌민파 잔여 세력을 규합해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장파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대안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쩡칭훙이 수사 대상에 오르지 않는 것 또한 장쩌민 세력이 시진핑과 왕치산에 대한 공격과 정변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쩡칭훙은 부패하고 음란하며 장쩌민과 다름없다. 그는 각급 관료들과 복잡다단하게 관련돼 있다. ‘경친왕(慶親王)’, ‘야심가’라는 칭호가 언론에 나타날 때마다 시민들은 악명 높은 쩡칭훙의 별칭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중국 사회와 국민이 반부패 운동에 거는 기대는 다름 아니라 쩡칭훙과 장쩌민의 법적 처벌에 있다

시진핑의 반부패 ‘호랑이 사냥’과 정상적인 국정운영의 최대 장애물이 바로 쩡칭훙이다. 현재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둘의 ‘다정한 투샷’은 쩡칭훙이 시진핑을 억누르는 수단이지만 한편으로는 쩡칭훙과 관련한 사건이 심상치 않게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쩡칭훙은 수많은 죄악을 저질렀으며 장쩌민 세력이 저지른 범죄의 대표 인물이다. 그러므로 시진핑과 쩡칭훙의 관계는 바로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사이인 것이다.

샤샤오창(夏小強·대기원 시사평론가)